설렘, 저장 중

로맨스 소설 - "섹시한 대표님"💕

빛나는 빛나 2026. 1. 2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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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 "섹시한 대표님"💕

 

제목 - <섹시한 대표님>

 

 

 

제1화: 그 남자의 향기는 위험하다

월요일 아침, 서울 도심의 공기는 주말의 여운을 시샘하듯 차갑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테헤란로 중심에 우뚝 솟은 '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빌딩 내부의 열기는 바깥 기온과는 딴판이었다. 특히 전략기획팀이 위치한 12층은 이른 아침부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전화벨 소리, 그리고 바쁘게 오가는 직원들의 발소리로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팀장님! 이것 좀 보세요. 지금 사내 게시판 서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에요!”

막 출근해 자리에 앉기도 전인 이봄 팀장에게 은주 사원이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봄은 한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또 누가 탕비실 커피 캡슐 다 써버렸대? 아니면 복사기 종이 걸렸다고 시위하나?”

“아뇨, 그런 시시한 문제가 아니죠! 오늘 자 차 대표님 출근 샷요! 이건 진짜 역대급이라니까요.”

은주 사원의 눈은 이미 하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화면 속에는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차은호 대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몰래 찍은 게 분명한 구도였지만, 화질을 뚫고 나오는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몸에 착 감기는 네이비 수트는 마치 그의 피부처럼 완벽한 핏을 자랑했고, 타이를 매지 않은 채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헤친 모습은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다. 그 사이로 살짝 드러난 날카로운 쇄골 라인과 탄탄한 가슴 근육의 굴곡은 보는 사람의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 만큼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와… 진짜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조각이라니까요. 저 눈빛 좀 보세요. 저러고 쳐다보면 누가 결재 서류를 제대로 내밀겠냐고요. 손 떨려서 오타 날 게 뻔하지.”

주변에 몰려든 여직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하지만 봄은 무심하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 정신 차리세요. 저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거 3년 넘게 겪고도 몰라요? 저 눈빛은 ‘네 기획안은 쓰레기다’라고 말하는 저승사자의 눈빛이라니까. 그리고 대표님이 아무리 섹시해 봐야 우리한테는 월급 주는 고용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우리는 감상하는 관객이 아니라 일하는 일꾼이라고요.”

봄의 단호한 태도에 직원들은 “역시 연애 세포 전멸한 이 팀장님답다”, “세상 무미건조하게 사신다”며 혀를 내두르고 흩어졌다. 사실 봄이라고 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차은호는 객관적으로 봐도 ‘섹시함’의 결정체였다.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회사를 이 정도로 키운 능력은 차치하더라도, 그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예리한 분위기는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봄에게 차은호는 그저 ‘까다로운 상사’일 뿐이었다. 그녀의 이상형은 다정다감하고, 주말이면 같이 공원을 산책하며 웃어줄 수 있는 리트리버 같은 남자였다. 차은호처럼 고양이과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흑표범 같은 남자는 그녀의 인생 시나리오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런 남자와 엮였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봄이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내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는 느낌. 봄은 직감적으로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왔네, 저승사자.’

구두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그 소리는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봄의 자리를 향해 다가왔다. 소리가 봄의 책상 바로 앞에서 멈췄다.

“이봄 팀장.”

낮게 깔린, 그러면서도 고막을 긁는 듯한 중저음의 목소리. 봄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수트가 아주…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계시더라고요. 덕분에 직원들 사기가 아주 충만합니다.”

은호는 대답 대신 무심한 눈길로 봄의 책상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왠지 모르게 불이 붙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봄의 의자 뒤로 천천히 걸어와 책상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봄의 코끝으로 차가운 새벽 공기와 섞인 묵직한 머스크 향, 그리고 은은한 샴푸 향이 훅 끼쳐 들어왔다. 그의 체온이 등 뒤에서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고, 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내 출근 복장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건 관심 없고.”

은호가 봄의 귀 옆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설렘이 아니라 분명 생존 본능에 의한 경계심이라고, 봄은 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하지만 심장 박동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지난번 런칭 쇼 기획안, 보류야. 데이터 분석이 너무 낙관적이더군. 이 팀장은 세상을 너무 핑크빛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어.”

“네? 아… 그건 지난 분기 지표를 기준으로 작성한 거라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봄이 변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코앞에 은호의 얼굴이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그의 긴 속눈썹과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당황한 얼굴까지 보일 정도였다. 은호는 피할 생각도 없는지, 오히려 봄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입술 끝을 아주 살짝 올렸다. 그 찰나의 미소가 너무 치명적이라 봄은 사고 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 팀장은 너무 긍정적인 게 문제야. 세상이 그렇게 다정하기만 하던가? 적어도 내가 아는 비즈니스는 훨씬 더 차갑고, 날카로운데.”

그의 시선이 봄의 입술에 아주 잠시 머물렀다 내려갔다. 그 짧은 찰나, 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평소라면 ‘네, 세상은 아름답습니다!’라고 받아치며 웃어넘겼을 텐데, 지금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5분 뒤에 내 방으로 오지. 이 기획안의 ‘현실’이 어떤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니까. 아, 그리고.”

은호는 봄의 책상 위에 있던 은색 볼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툭 내려놓았다. 손가락 끝이 아주 살짝 스쳤을 뿐인데, 봄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거렸다.

“커피 좀 줄여. 카페인 때문에 손 떠는 거, 보기 안 좋아.”

은호가 멀어지자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주변 직원들은 이미 제각기 제 할 일을 하는 척하면서도 눈은 이쪽을 향해 있었다. 김 대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지금 방금 수확한 사과처럼 빨간데?”

봄은 손부채질을 하며 황급히 서류 뭉치를 챙겼다.

“에어컨 좀 더 틀라고 해야겠어. 아침부터 왜 이렇게 더워? 중앙 제어라더니 일을 안 하나 봐.”

사실 봄도 알고 있었다. 방금 느낀 그 기묘한 기류는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은호라는 남자가 가진, 타인의 개인적인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침범하는 그 무례하고도 치명적인 방식 때문이었다.

봄은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했다. 이상하다. 분명 내 이상형도 아니고, 성격도 최악인 남자인데. 왜 그가 남기고 간 묵직한 머스크 향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걸까. 손바닥에 닿았던 그의 서늘한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아 봄은 애먼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정신 차려, 이봄! 저건 그냥 일을 아주 잘하는, 성격 나쁜 섹시한 악마일 뿐이야. 네 인생에 로맨틱 코미디는 없어. 오직 오피스 서바이벌뿐이라고!’

봄은 볼을 찰싹 때려 정신을 가다듬고는 대표실을 향해 발을 뗐다. 하지만 대표실 앞에 서자마자 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표실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통유리 너머로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호는 책상 앞이 아닌, 창가 근처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역광 때문에 그의 실루엣이 더욱 짙게 보였고, 창밖의 햇살이 그의 어깨선에 걸려 부서졌다.

“앉아.”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봄은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고급 가죽 소파가 몸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은호는 태블릿을 내려놓고는 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무 말도 없는 침묵이 10초, 20초 흘러갔다. 정적 속에서 들리는 건 시계 초침 소리와 봄의 불규칙한 숨소리뿐이었다.

“대표님, 아까 말씀하신 데이터 분석 건에 대해서는 제가 추가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20대 타겟의 소비 패턴이 최근 들어…”

봄은 최대한 프로페셔널한 목소리를 내며 서류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온 힘을 다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은호는 서류를 받는 대신, 서류를 잡고 있는 봄의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를 빤히 쳐다봤다.

“손이 여전히 떨리는군. 이 팀장, 내가 그렇게 무섭나?”

“아뇨? 전혀요. 대표님이 왜 무섭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겁니다. 카페인 부작용, 그거 아주 무서운 거거든요.”

봄의 뻔한 거짓말에 은호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는 모습은 회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섹시해서 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넋을 잃고 말았다.

“카페인 때문이라… 그럼 심장도 빨리 뛰겠군. 그것도 카페인 때문이고?”

은호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이 무색할 만큼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봄은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소파 깊숙이 몸이 묻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은호의 시선이 봄의 눈을 지나 코끝, 그리고 입술에 머물렀다.

“이 팀장, 나는 비즈니스에서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본인의 반응에 솔직하지 못한 것도 일종의 기만이지.”

“저는 기만한 적 없습니다! 정말 카페인 때문이라니까요!”

“그래?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군.”

은호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봄은 눈을 감아야 할지, 아니면 이 서류 뭉치로 그의 얼굴을 밀어내야 할지 짧은 순간 수만 가지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은호의 손은 봄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을 뿐이었다. 뜨거운 체온이 손목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빠른데. 이건 카페인이라기엔 너무 ‘격렬’하군.”

은호의 엄지손가락이 봄의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곳을 가볍게 문질렀다. 봄은 전신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자극에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이제 장난기를 거두고 짙은 갈증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이래도 카페인 탓을 할 건가?”

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은호의 향기가, 그의 체온이, 그리고 그가 내뱉는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20대 후반, 연애 세포는 둔할지언정 본능은 살아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이 남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온몸이 경고하고 있었다.

“대표님… 이거 놓아주세요.”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는 힘없이 젖어 있었다. 은호는 잠시 봄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소파 등에 몸을 기댔다.

“기획안 수정은 내일 아침까지. 오늘은 이만 나가봐.”

봄은 도망치듯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렸다. 봄은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손목에는 여전히 은호의 손길이 닿았던 자리가 화끈거리고 있었다.

분명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이봄의 평온했던 오피스 라이프는 끝났다. 아니, 어쩌면 더 지독하고 섹시한 전쟁이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멀어지는 봄의 발소리를 들으며, 대표실 안의 은호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목에서 느껴지던 그 격렬한 고동이 아직도 손끝에 남은 듯했다.

“연애 세포가 둔하다더니… 거짓말이었군, 이봄.”

은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그것처럼 매우 위험하고도 아름다웠다.




제2화: 비 내리는 오후의 밀착

차은호 대표의 방을 빠져나온 뒤로, 봄의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수식어들로 가득 찼다. ‘맥박’, ‘손목’, ‘카페인’, 그리고 그 남자의 ‘향기’. 업무에 집중하려 애써도 서류 위의 글자들이 자꾸만 은호의 날카로운 눈매처럼 보였다.

“팀장님, 아까 대표님실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까부터 서류를 거꾸로 들고 계신데. 혹시 대표님한테 엄청 깨지신 거예요?”

옆자리 김 대리의 날카로운 지적에 봄은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든 종이를 황급히 뒤집었다.

“아, 그게… 이번 기획안이 워낙 까다로워서 그래요. 데이터 보완할 게 산더미라 머리가 좀 아프네. 깨지긴 누가 깨졌다고 그래?”

봄은 대충 둘러대며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화면에 띄워진 엑셀 차트보다 방금 전 손목에 닿았던 은호의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감촉이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분명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단순히 커피 때문에 뛰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 오만하고 섹시한 대표님은 봄의 당황스러움을 아주 정밀하게 즐기고 있었다.

‘나쁜 남자. 전형적인 나쁜 남자야. 저런 타입은 절대 가까이하면 안 돼. 인생 피곤해진다고.’

봄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다짐했다. 그녀가 꿈꾸는 로맨스는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니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편안하고 다정한 관계가 최고라고 믿어왔다. 차은호는 그 모든 평화로운 환상을 뿌리째 흔드는 존재였다.

그때, 사내 메신저가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깜빡였다.

[차은호 대표: 오후 2시, K-뷰티 브랜드 리브랜딩 미팅 있습니다. 이 팀장 같이 가죠. 1층 로비로.]

봄은 짧고 간결한 메시지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외부 미팅이라니. 그것도 단둘이? 보통은 팀원 한 명 정도 더 대동하는 게 관례였지만, 차 대표는 종종 효율성을 핑계로 실무 책임자인 봄만 콕 집어 데려가곤 했다.

오후 2시, 약속된 장소인 로비로 내려가자 은호의 검은색 세단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뒷문을 열어주려 하자, 은호가 직접 손을 내저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은 내가 직접 운전하지. 이 팀장, 타.”

봄은 얼떨결에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 안은 은호의 책상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특유의 머스크 향이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강남 한복판의 정체된 도로 위에서도 은호는 여유로웠다.

사무실 밖에서의 은호는 한층 더 위험해 보였다. 수트 재킷을 뒷좌석에 던져두고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운전대를 잡은 그의 팔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봄의 시선은 갈 곳을 잃었다. 특히 가늘고 긴 손가락이 가죽 스티어링 휠을 부드럽게 감아쥐는 모습은 묘하게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이 팀장, 아까부터 창밖만 보는데. 나랑 가는 게 그렇게 불편한가? 아니면 내가 운전을 너무 험하게 하나?”

은호가 신호 대기 중에 툭 던졌다.

“불편하다니요! 대표님이 직접 운전해 주시는데 영광이죠. 다만… 이번 미팅 업체가 워낙 까다로운 곳이라 전략을 구상하느라 그랬습니다. 상대방이 좀 만만치 않은 분들이잖아요.”

“전략이라. 그럼 내 얼굴에 전략이 쓰여 있나? 아까부터 백미러로 나만 훔쳐보던데. 그 눈빛, 전략보다는 관찰에 가깝던데 말이야.”

정곡을 찔린 봄의 얼굴이 다시 화끈거렸다. 이 남자는 정말 눈이 옆에도 달린 게 분명했다.

“그, 그건 대표님이 오늘 타이도 안 매시고 너무… 자유분방해 보이셔서요. 대표로서의 품위 유지를 걱정하는 팀장의 충성심이라고 해두죠.”

봄의 뻔뻔한 대답에 은호가 낮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엔진의 저음과 섞여 조수석까지 미동을 일으켰다.

“품위라. 그럼 이 팀장이 직접 매줄 건가? 타이가 없어서 품위가 없어 보인다면 말이야. 난 언제든 환영인데.”

“네? 제가요? 그건 비서실 업무죠!”

“싫으면 관두고. 그런데 이 팀장, 아까부터 계속 아랫입술 깨무는 버릇… 그거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보는 사람 꽤 자극하거든. 적어도 내 앞에서는 조심해.”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내용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봄은 깜짝 놀라 입술을 떼어냈고, 은호는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여유롭게 차를 몰았다.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한 미팅 룸에서 진행된 미팅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어졌다. 상대측 K-뷰티 브랜드 매니저는 은호의 명성만큼이나 까다롭고 공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예산은 깎으면서 노출 효과는 극대화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은호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상대의 허점을 찔렀다.

“그 예산으로는 저희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없습니다. 대신, 저희가 보유한 인플루언서 네트워크를 독점으로 제공하죠. 이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가 차트를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설명할 때마다, 봄은 저도 모르게 그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고 있었다. 일할 때의 차은호는 섹시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셔츠 단추 사이로 살짝 보이는 쇄골과 열띤 토론으로 인해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조차 그의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했다.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죠. 저희 제안서 다시 검토해 보시고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두 시간여의 치열한 미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고 굵은 빗줄기가 갑작스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어머, 비가 오네. 일기예보에도 없었는데… 우산도 없는데 어쩌죠?”

봄이 당황하며 건물 입구에서 발을 멈췄다. 은호는 무심하게 하늘을 보더니 뒷좌석에서 가져온 자신의 수트 재킷을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펼쳐 올렸다.

“차까지 거리가 좀 돼. 뛰어가지. 내 옷 젖는 거 걱정할 시간에 이 팀장 신발 젖는 거나 걱정해.”

“네? 아, 저는 괜찮은데 대표님 비싼 옷 상하잖아요!”

“옷보다 이 팀장 감기 걸려서 내일 결근하는 게 나한테는 훨씬 더 큰 손해야. 프로젝트 일정 차질 생기면 이 팀장이 다 책임질 건가?”

말은 차갑게 했지만, 은호는 이미 봄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봄의 심장이 비명 소리를 질렀다. 은호의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이 봄의 가냘픈 몸에 완벽하게 밀착되었다. 재킷 하나를 같이 쓴 채 빗속을 뚫고 가는 동안, 봄은 빗소리보다 더 크게 귀를 울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은호가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은호의 체취와 빗내음이 뒤섞여 봄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은호는 아예 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뛰었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체온이 섞였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봄의 몸이 그에게 더 바짝 붙었다.

겨우 차 안으로 들어왔을 때, 두 사람의 옷은 이미 반쯤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비 진짜 무섭게 오네요. 대표님, 괜찮으세요?”

봄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물었다. 얇은 실크 블라우스가 빗물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었고, 그로 인해 드러난 실루엣을 봄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은호의 시선이 봄의 하얀 목덜미와 젖은 셔츠 자락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빛이 아까보다 훨씬 더 깊고 위험하게 가라앉았다.

“이봄 팀장.”

은호가 평소보다 더 낮은, 금방이라도 짐승의 으르렁거림으로 변할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봄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은호의 손이 봄의 젖은 앞머리를 천천히 넘겨주었다.

“내가 아까 말했지. 자극한다고.”

“대, 대표님? 그게 무슨…”

“지금 당신 모습이 얼마나 위험한지, 내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전혀 모르나 본데.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은호의 얼굴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차창 밖으로 거세게 내리치는 빗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버린 것 같았다. 좁은 차 안, 젖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서로의 뜨거운 열기, 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진한 머스크 향기.

봄은 눈을 피하려 했지만, 은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턱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려 시선을 고정시켰다.

“도망가지 마. 이번에도 카페인 핑계 대면, 그땐 정말 화낼지도 모르니까.”

그의 입술이 봄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연애 세포가 둔하다는 건, 이런 치명적인 순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능은 외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주는 긴장감이, 공포가 아니라 환희에 가깝다는 것을.

“이 팀장, 내 인내심 테스트하는 중이라면… 축하해. 완전히 성공이야.”

은호가 입술을 겹쳐오기 직전, 봄의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깨는 벨소리에 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저, 전화! 전화가 왔네요! 받아야 해요!”

봄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엄마’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은호는 헛웃음을 삼키며 운전대에 이마를 기대었다가, 다시 차가운 대표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채 가시지 않은 열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받아. 그리고 정리되는 대로 출발하지. 비 더 오기 전에.”

봄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고, 그녀의 평온했던 마음속 폭풍우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차 안에는 여전히 두 사람의 거친 호흡과 묘한 열기가 가득했다. 은호는 시동을 걸었지만, 기어를 넣기 전 봄의 손등 위에 자신의 큰 손을 잠시 겹쳤다.

“오늘 밤, 잠 잘 못 잘 것 같은데. 나 말고 이 팀장이 말이야.”

그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차를 출발시켰다. 봄은 대답 대신 젖은 손바닥을 꼭 쥐었다. 이제 정말 큰일 났다. 이 섹시한 대표님이, 단순한 상사 그 이상으로… 아니,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제3화: 젖은 셔츠와 밤의 정적

빗줄기는 서울 시내를 통째로 삼킬 기세로 거세졌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앞 유리를 닦아냈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차 안의 공기는 아까의 미수로 끝난 키스 직전의 열기 때문에 지독하게 밀도가 높았다.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있었지만, 봄의 뺨에 닿는 공기는 여전히 후끈거렸다.

봄은 조수석에 꼿꼿이 앉아 정면만을 응시했다. 엄마와의 통화는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젖은 블라우스가 살에 달라붙어 한기가 느껴질 법도 한데, 은호의 손길이 닿았던 턱 끝과 손목은 여전히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엔진 소리와 은호의 낮은 숨소리가 마치 하나의 리듬처럼 섞여 봄의 고막을 두드렸다.

“이 팀장.”

정적을 깬 건 은호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의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듯 묘한 물기가 서려 있었다.

“네, 네! 대표님.”

“벨트 풀어.”

“네?! 아, 아니, 갑자기 왜…!”

봄은 목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커진 채 경계 태세를 갖춘 그녀를 보며, 은호는 운전대에 한 손을 얹은 채 특유의 나른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도착했다고. 내릴 준비 하라는 뜻인데, 무슨 상상을 한 거지?”

봄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차는 회사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차창에 반사되어 은호의 얼굴에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은호가 더 빨랐다. 그는 시동을 끄자마자 중앙 잠금 장치 버튼을 눌렀다. 철컥.

“대표님? 문이 안 열리는데요.”

“지금 그 꼴로 내리겠다고? 로비에 아직 퇴근 안 한 직원들이 널렸을 텐데. 우리 팀원들도 몇 명 남아있을지 모르고.”

은호의 시선이 봄의 가슴팍에 잠시 머물렀다. 빗물에 젖어 투명해진 화이트 블라우스 너머로 연한 속옷의 라인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봄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아…!”

“뒷좌석에 내 재킷 있어. 그거 걸치고 올라가.”

은호는 무심하게 뒷좌석에 던져두었던 네이비 수트 재킷을 건넸다. 봄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은호의 재킷은 그녀에게 너무 커서 마치 아빠 옷을 훔쳐 입은 아이 같았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운 은호의 묵직한 머스크 향기가 보호막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다. 묘한 안도감과 함께 심박수가 다시 가팔라졌다.

두 사람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 사무실로 향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야근을 즐기지 않는 전략기획팀원들은 이미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오직 복도의 푸르스름한 비상등과 창밖 도심의 불빛만이 가느다랗게 내부를 비추며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비품실에 지난번 행사 때 쓰고 남은 여분 샘플 티셔츠 있을 거야.”

“대표님은요? 대표님도 다 젖으셨는데.”

“난 내 방에 여벌 셔츠가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이 팀장이나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

봄은 서둘러 비품실로 달려가 젖은 블라우스를 벗어 던지고 브랜드 홍보용으로 제작된 심플한 흰색 면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은호의 재킷을 걸치고 있던 짧은 순간의 감각이 자꾸만 되살아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재킷 안감에 닿았던 피부의 감촉이 여전히 생생했다.

‘진정해, 이봄. 이건 그냥 업무의 연장일 뿐이야. 비가 와서, 상황이 조금 특별해서 착각하는 거라고.’

봄은 찬물로 세수를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이미 평소의 냉정한 팀장이 아니었다. 발갛게 상기된 뺨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배신하고 있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자, 대표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은호는 젖은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새 셔츠를 꺼내 입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봄이 들어오는 소리에 그가 상체를 휙 돌렸다.

반쯤 열린 셔츠 사이로 탄탄한 복근과 넓은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운동으로 다져진 구리빛 피부 위로 빗방울 몇 개가 타고 흐르는 모습은, 어떤 패션 화보보다도 강렬하고 섹시했다. 특히 셔츠를 걸치느라 들어 올린 팔의 이두박근이 불끈 솟아오른 모습에 봄은 숨을 들이켰다.

“아! 죄송합니다! 다 갈아입으신 줄 알고…!”

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뒤를 돌았다. 하지만 이미 뇌리에는 그의 완벽한 상체의 굴곡이 선명하게 박혀버린 뒤였다.

“이 팀장,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성격이 급한 거야, 아니면 보고 싶은 게 많은 거야?”

뒤에서 은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그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봄의 등 뒤로 은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다 갈아입었으면 이쪽으로 와서 서류 정리 마저 하지. 아까 하던 이야기가 매끄럽게 끝나지 않았잖아.”

봄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그는 어느새 새하얀 드레스 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타이는 매지 않았고, 셔츠 깃은 흐트러진 채였으며 소매는 거칠게 걷어 올린 상태였다. 그 정제되지 않은 모습이 평소의 완벽한 수트 차림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섹시했다.

“아까… 차 안에서 하셨던 말씀 말인가요? 카페인 어쩌고 하셨던…?”

봄이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은호는 책상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책상 위의 스탠드 조명이 그의 얼굴 반쪽을 밝게 비춰, 그의 눈빛이 더욱 깊고 예리하게 보였다.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자극받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팀장이 내 인내심을 테스트 중이라는 이야기.”

은호의 직설적인 화법에 봄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텅 빈 사무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미세한 숨소리와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 팀장은 참 신기해. 일할 때는 그렇게 날카롭고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쪽으로는 그렇게 무딘 거지? 아니면 무딘 척 연기를 해서 내 반응을 즐기는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업무적인 파트너로서…”

“모른다고? 내가 지금 이 야밤에 젖은 몸으로 당신이랑 단둘이 여기 있는 이유를, 정말 단순히 리브랜딩 기획안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은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봄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 뒤에 차가운 유리 파티션이 닿았다. 은호는 두 손으로 파티션을 짚어 봄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퇴로가 차단된 공간에서 은호의 체취가 봄의 감각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봄 팀장, 당신이 아까 차 안에서 나를 어떤 눈으로 봤는지 본인은 모르지? 그건 단순히 당황한 눈이 아니었어.”

은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의 코끝이 봄의 코끝에 살짝 스칠 만큼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에서 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입술의 감촉 대신, 귀 밑을 간지럽히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당신 맥박, 지금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격렬해. 그런데도 아니라고 할 거야? 당신 몸은 이미 다 대답하고 있는데.”

은호의 입술이 봄의 귓볼에 아주 살짝, 정말 깃털처럼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감각은 마치 뇌를 관통하는 전율 같았다. 봄은 전신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은호의 단단한 손이 어느새 봄의 허리를 강하게 받쳐 올렸다.

“대표님, 이러시면 안 돼요. 우리는 상사와 부하 직원이고, 회사에서 이러는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표 아니야. 그냥 당신 때문에 이성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남자지. 내 인내심은 이미 아까 그 차 안에서 바닥났으니까.”

은호의 눈동자는 깊은 갈망으로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봄의 턱을 부드럽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참아왔던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하듯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차 안에서의 망설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칠고, 뜨겁고, 절박했다. 봄은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뜨거운 열기를 불어넣을 때마다, 봄은 숨이 가빠와 그의 젖은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은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등을 타고 올라와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비 내리는 밤의 정적은 두 사람의 젖은 호흡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빗소리로 가득 찼다. 사무실 안의 온도는 그 어떤 한여름 낮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봄은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도망칠 마음도 없었다. 둔했던 연애 세포가 한꺼번에 깨어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이어진 깊은 키스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은호의 엄지손가락이 봄의 발갛게 부어오른 입술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의 눈빛에는 승리감과 함께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이래도… 카페인 때문인가, 이봄 씨?”

그의 나른하고도 치명적인 물음에 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품 안에서 터질 듯한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가 전해주는 체온에 온몸을 맡길 뿐이었다.

창밖의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한 완벽한 정적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봄은 깨달았다. 이제 다시는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섹시한 대표님이 제안하는 이 위험한 게임에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4화: 어제의 키스, 오늘의 거리감

어젯밤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지나치게 눈부셔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이봄은 침대 위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톡톡 건드려 보았다.

'꿈 아니지? 제발 꿈이라고 해줘, 아니, 꿈이면 안 돼... 아니야, 꿈이어야만 해!'

꿈이라고 하기엔 입술에 남은 그 뜨거운 감촉과, 코끝을 맴돌던 묵직한 머스크 향이 너무나 생생했다. 평생 연애 세포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그녀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철벽녀', '연애 고자'라 불리며 일과 결혼했다는 비아냥을 훈장처럼 달고 살았던 이봄이었다. 그런데 어제, 그 차갑고 섹시한 차은호 대표와 텅 빈 사무실에서 그와...

"으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이봄,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봄은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뻥뻥 찼다. 좋게 말해 로맨틱한 키스였지, 냉정하게 보면 상사와 부하 직원의 부적절한 신체 접촉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사내 여직원들의 '공공의 적'이자 '공공의 연인'인 차은호다. 그가 단순히 비 오는 밤의 분위기에 취해 저지른 실수라면? 아니면 연애 젬병인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던진 고도의 심리전이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 바늘은 주인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출근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봄은 최대한 평소와 다름없는 '철벽 팀장'의 모습으로 무장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짙은 레드 립스틱을 꼼꼼히 바르고, 단정한 화이트 셔츠의 단추를 맨 위까지 꽉 채웠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오늘은 무조건 철저한 비즈니스 모드야. 어제 일은 기록적인 폭우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 혹은 집단적 독성 분자로 인한 착란 현상이라고 치부하는 거야. 나는 프로니까.'

회사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봄은 평소보다 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직원들에게 평소보다 과하게 밝은, 거의 기괴할 정도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김 대리님! 오늘 날씨 정말 끝내주죠? 어제의 그 칙칙한 비는 다 어디 갔나 몰라요! 하하하!”

“어... 네, 팀장님. 근데 오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니면 너무 하이텐션이시거나. 혹시 어제 대표님이랑 미팅이 대박이라도 난 거예요?”

김 대리의 예리한 질문에 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박은 무슨! 그냥 평범한 미팅이었어요. 비즈니스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오고 가는 계약 속에 싹트는... 아니, 쌓이는 신뢰!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 순간, 뒤에서 낮게 깔린, 그러면서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 돋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봄 팀장.”

그 목소리 하나에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동결되었다. 봄은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오늘도 완벽한 수트 핏을 자랑하는 차은호가 서 있었다. 어제 그 젖은 셔츠를 입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탐닉하던 남자는 어디 가고, 다시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냉혈한 대표님이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제보다 훨씬 더 짙고 은밀했다.

“아, 대,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출근하십니까.”

봄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은호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에 두 사람과 김 대리, 그리고 다른 팀 직원들이 빽빽하게 찼다.

봄은 정면 거울에 비친 은호의 얼굴을 훔쳐봤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층수 표시판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가에 아주 희미하고도 비스듬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팔이 미세하게 움직여 봄의 어깨와 살짝 스칠 때마다 봄은 감전된 것처럼 움찔거렸다.

“어제 비가 많이 와서 귀가길이 고생스러웠을 텐데. 기획안 수정은 밤새 잘 끝냈나?”

은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극히 공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 대리가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기류를 살피고 있었다.

“네! 거의 다 됐습니다. 이따가 오전 회의 전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 팀장.”

은호가 갑자기 봄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몸을 기울였다. 은밀한 우디 향이 다시 봄의 코끝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오늘 단추가 너무 꽉 조인 것 같은데. 보고 있는 내가 다 숨이 막히군. 답답하지 않나?”

그의 시선이 봄의 목 끝까지 단단히 채워진 단추에 노골적으로 머물렀다. 봄은 당황해 손으로 목을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 뒤는 이미 엘리베이터 벽이었다.

“아, 이건 제 취향입니다! 저는 단정한 걸 좋아해서요! 전혀 답답하지 않습니다!”

“그래? 난 좀 걱정돼서. 어제는... 꽤 자유로워 보이더니. 역시 사람은 밤과 낮이 다른 법인가?”

‘어제’와 ‘자유’라는 단어에 힘을 준 그의 낮은 목소리에 봄의 얼굴이 폭발할 듯 달아올랐다. 옆에 있던 김 대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어제요? 어제 미팅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어요? 두 분 분위기가 좀 묘한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김 대리님, 오늘 외주업체 미팅 준비 다 됐죠? 빨리 올라가서 회의합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봄은 100미터 육상 선수처럼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등 뒤에서 은호의 낮은,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돌아볼 용기는커녕 숨을 쉴 용기도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 했지만, 도무지 엑셀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0분마다 휴대폰을 확인하고, 대표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양이가 털을 세우듯 깜짝깜짝 놀라는 꼴이라니. 팀원들은 평소 카리스마 넘치던 이 팀장이 왜 저렇게 얼을 빼놓고 있나 싶어 수군거렸다.

그때, 책상 위의 내선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략기획팀 이봄입니다.”

[내 방으로 와. 지금 당장.]

은호의 짧고 강압적인,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담긴 명령이었다. 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거울을 보며 립스틱이 번지지 않았는지, 얼굴이 너무 빨갛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좋아, 이건 업무 보고야. 어제 일은 잊자. 나는 연봉 값을 하는 프로 팀장이다.'

대표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은호는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햇살을 등진 그의 실루엣은 비현실적일 만큼 완벽했다.

“기획안 가져왔나?”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데이터 보완했고, 타겟 분석도 다시 했습니다.”

봄은 최대한 거리를 두며 책상 끝에 서류를 살포시 내밀었다. 은호는 다가와 서류를 받아들더니 한 장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넘겼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는 정적 가운데 봄은 자신의 구두 앞코만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이 팀장.”

“네, 대표님.”

“여기 앉아봐. 서서 보고받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은호가 가리킨 곳은 어제 두 사람이 함께 앉았던 그 소파가 아니라, 자신의 책상 바로 앞에 있는 의자였다. 봄은 가시방석에 앉는 심정으로 의자 끝에 겨우 걸터앉았다.

“어제 일 말인데.”

은호가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봄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꽉 쥐었다.

“대표님, 어제는 제가... 비가 너무 많이 오고, 미팅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되어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사내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대표님의 위신을 깎을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아니, 비업무적인 접촉이 절대 없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비장하기까지 한 봄의 선언에 은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판단력이 흐려졌다? 뼈를 깎는 노력?”

“네! 일종의 일시적인 뇌 회로의 과부하 같은 거죠. 빗소리의 주파수와 머스크 향의 화학 작용이 만들어낸 착란 현상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어제의 그... 그 입맞춤은 물리적인 마찰일 뿐, 어떠한 감정적 데이터도 포함되지 않은 이벤트였습니다. 없었던 일로 해주십시오!”

은호는 대답 대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는 한참 동안 봄을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관찰했다. 봄은 그 시선이 너무 뜨겁고 집요해서 당장이라도 대표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봄 팀장은 참 대단해. 내 입술을 일시적인 '물리적 마찰' 취급을 받게 만들다니. 내 평생 이런 굴욕은 처음인데.”

은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봄에게 다가왔다. 그는 책상 끝에 걸터앉아 상체를 숙였다. 봄의 코앞까지, 그의 모공 하나하나가 보일 만큼 얼굴이 다가왔다.

“그런데 어쩌지? 내 시스템은 어제 이후로 훨씬 더 정교해졌어. 오류가 아니라 업데이트가 된 기분이거든.”

“뭐가... 업데이트되셨다는 건지...”

“이봄이라는 여자가, 단순히 내 유능한 부하직원이 아니라는 거. 내 밤을 통째로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는 거.”

은호의 긴 손가락이 봄의 셔츠 깃으로 향했다. 봄은 숨을 멈추고 몸을 굳혔지만, 그는 그저 조금 비뚤어진 깃을 섬세하게 매만져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이 봄의 목 피부에 살짝 스칠 때마다 봄은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단추, 하나만 풀어. 숨 막혀 보여서 일이 제대로 되겠어? 부하 직원의 질식사까지 책임지고 싶진 않거든.”

“아, 아뇨! 저는 이게 편합니다!”

“내가 안 편해. 자꾸 그 꽉 채워진 단추를 내 손으로 직접 풀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서 미치겠거든.”

은호의 낮은 속삭임이 봄의 귓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제처럼 거친 키스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런 일상적인 공간에서 느껴지는 은밀하고도 소유욕 섞인 긴장감이 봄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어제 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노력해 보라고. 대신.”

그가 봄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다른 사람은 절대 들을 수 없는 은밀한 농도로 속삭였다.

“앞으로 내가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도 판단력 흐려졌다는 뻔한 핑계 대지 마. 난 이제 겨우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니까.”

그의 선전포고와 같은 말에 봄은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은호는 만족스러운 듯 봄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볍게 한 번 쓸어 넘겨주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나가봐. 기획안은 검토하고 다시 부르지. 그때는 단추 하나쯤은 풀고 오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봄은 어떻게 대표실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김 대리가 다시 다가와 속삭였다.

“팀장님, 진짜 괜찮아요? 대표님이 또 엄청 독설 퍼부으셨어요? 얼굴이 거의 타오르고 있는데!”

봄은 멍한 눈으로 김 대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목을 죄고 있던 셔츠의 제일 윗 단추를 하나, 투둑 소리가 나게 풀었다.

“아니... 독설은 아닌데, 날씨가... 날씨가 너무 덥네. 에어컨 좀 풀가동하라고 해.”

김 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지만, 봄의 가슴속은 이미 한여름의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시스템 오류'라고 부정하기엔, 차은호라는 존재가 그녀의 평온했던 인생 시나리오를 완전히 파괴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으니까.




제5화: 대표님의 아주 사적인 초대

단추 하나를 풀었을 뿐인데, 사무실의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봄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시스템 오류'라고 우기던 그녀의 뇌 회로는 차은호의 "이제 시작할 생각이니까"라는 선전포고 이후로 완전히 재배열되었다.

오후 내내 봄은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투명한 유리창 너머 대표실로 향했다. 그가 전화를 받으며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 서류를 검토하며 만년필을 돌리는 손가락, 그리고 가끔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는 것 같은 기분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퇴근 시간을 30분 앞둔 시점, 봄의 책상 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차은호 대표: 6시 정각에 지하 주차장 C구역으로 오지. 오늘은 외근 업무 연장이야.]

'외근? 이 시간에?'

봄은 의아했지만 상사의 명령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아니, 사실 거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 더 컸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팀원들에게는 "대표님 지시로 외부 미팅이 있다"며 대충 둘러댔지만, 뒤통수에 꽂히는 김 대리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지하 주차장 C구역. 은호의 차는 이미 시동이 걸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조수석 문을 열자, 어제와 같은 묵직한 머스크 향이 그녀를 반겼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대표님? K-뷰티 쪽에서 추가 미팅 요청이라도 왔나요?"

안전벨트를 매며 묻는 봄의 질문에 은호는 대답 대신 가볍게 엑셀을 밟았다. 차는 회사를 빠져나와 북적이는 도심을 통과하더니, 점점 한적한 주택가 언덕길로 향했다.

"대표님? 이 길은 미팅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 미팅은 취소됐어. 대신 아주 중요한 '개인적인 업무'가 남았지."

은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차가 멈춰 선 곳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빌라 앞이었다. 은호는 익숙하게 차를 세우고 내렸다.

"내려. 도착했으니까."

봄은 당황한 눈으로 빌라를 올려다봤다. "여기가 어딘데요?"

"내 집."

"네?! 대표님 댁에요? 갑자기 왜..."

"음... 내가 지금 배가 아주 고프거든."

은호는 어안이 벙벙해진 봄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안으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들어선 그의 집은 평소 은호의 이미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이었다. 모노톤의 가구들과 은은한 간접 조명, 그리고 커다란 통창 너머로 펼쳐진 야경이 감탄을 자아냈다.

"잠깐 앉아 있어. 금방 준비할 테니까."

은호는 수트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향하더니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봄은 소파 끝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대한민국 최고의 홍보 대행사 대표가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한다니. 그것도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대표님, 제가 도울 일은 없나요? 그래도 제가 여자인데..."

"앉아 있는 게 돕는 거야. 요리까지 이 팀장 손 빌리면 내가 너무 무능해 보이잖아."

칼질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은호는 능숙한 솜씨로 스테이크를 굽고 샐러드를 만들었다. 고기 익는 냄새와 고소한 버터 향이 집안을 채우자, 봄의 긴장감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약 30분 후, 식탁 위에는 근사한 2인용 식사가 차려졌다. 은호는 와인 두 잔을 따르며 봄의 맞은편에 앉았다.

"드셔보시지. 독은 안 탔으니까."

봄은 조심스럽게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육질에 눈이 번쩍 뜨였다.

"와... 진짜 맛있어요! 대표님 요리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의외인가? 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은 뭐든 즐기는 편이야. 요리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지."

마지막 단어에서 은호의 시선이 봄의 눈동자에 고정됐다. 봄은 사레가 들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대표님, 그런데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거예요?"

은호는 와인잔을 흔들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해. 사무실에선 이 팀장이 자꾸 '팀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를 대하니까. 그 가면을 벗기려면 내 사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어."

그는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숙이며 봄에게 다가왔다. 조명 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빛났다.

"여기선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마. 차은호, 라고 불러도 좋고."

"그건 좀... 회사 생활이 곤란해질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이봄 씨, 어제 그 키스가 정말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 내 눈을 보고 다시 한번 말해봐."

은호의 직구에 봄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와인의 온기 때문인지, 그의 시선 때문인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결심한 듯 잔을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니요. 오류는 아니었어요. 사실... 저도 좋았거든요."

봄의 솔직한 고백에 은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봄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제 차 안에서처럼 다시 좁혀졌다.

"솔직해서 좋네. 그런데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해."

은호는 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목덜미에 닿자 봄은 짧은 전율을 느꼈다.

"난 이봄 씨가 나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회사에서도 내 생각만 하길 바라. 내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대표님도... 제 생각을 하신다고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아주 미치겠지. 특히 오늘 아침에 그 단추 꽉 채우고 나타났을 땐, 당장이라도 회의실로 끌고 가고 싶은 걸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은호의 노골적인 표현에 봄은 숨이 가빠졌다. 그는 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봄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닿았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이 자신의 것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봄, 한 번만 더 묻지. 오늘 밤도 그냥 집으로 도망갈 건가?"

은호의 입술이 봄의 입술 바로 위에서 멈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는 순간, 봄은 깨달았다. 이제 이 남자가 치는 덫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 덫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봄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 은호는 기다렸다는 듯 더욱 깊고 진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어제 사무실에서의 키스가 탐색전이었다면, 지금의 키스는 완전한 소유의 시작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화려했지만, 지금 봄에게 보이는 건 오직 눈앞의 이 섹시한 남자뿐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은밀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는 동안, 봄은 은호의 의외의 모습들을 발견했다.

"대표님은 원래 이렇게 저돌적이신가요?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엄청 차가운 이미지인데."

"차갑지 않으면 다들 내 일에 간섭하려고 하니까. 하지만 내 여자한테까지 차갑게 굴 만큼 멍청하진 않아."

'내 여자'라는 표현에 봄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녀는 은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은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봄, 내일 회사 가면 또 팀장님인 척하겠지?"

"당연하죠. 우리 사내 연애 금지 조항도 있잖아요."

"그 조항, 내가 만든 거야. 그리고 내가 만든 규칙은 내가 깰 권리도 있지. 하지만 당분간은 비밀로 해줄게. 당신이 곤란해지는 건 싫으니까."

은호의 배려 섞인 말에 봄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냉철한 사업가인 줄만 알았던 그가 자신을 위해 규칙까지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신, 회사 밖에서는 보상을 확실히 해줘야겠어."

은호의 눈빛이 다시 짓궂게 변했다. 그는 봄을 소파 위로 부드럽게 눕히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떤 보상이요?"

봄이 짐짓 모르는 척 묻자, 은호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 그게 내 첫 번째 보상이야."

봄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은호의 눈빛은 농담이 아니었다. 진심 어린 갈망과 애정이 가득한 그 눈빛을 보며, 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차은호의 집에서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와 낮은 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연애 세포가 둔하다던 이봄은 그날 밤,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스승에게 연애의 모든 단계를 아주 농밀하게 전수받았다.



제6화: 비밀 연애의 스릴과 의외의 복병

낯선 천장, 그리고 코 끝을 스치는 묵직하고도 고급스러운 머스크 향. 봄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차 대표의 집에서 보낸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함께 나눴던 와인, 은밀했던 대화, 그리고 소파에서 침실로 이어졌던 그 뜨거웠던 열기까지.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침대는 이미 비어 있었다. 대신 협탁 위에는 깔끔하게 접힌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먼저 출근해. 부엌에 해장용 수프 준비해 뒀으니까 꼭 먹고 나오고. 회사에서 보자, 이 팀장.]

메모를 읽는 봄의 입가에 바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얼음 성의 주인 같던 차은호가 아침밥까지 챙겨주는 남자였다니. 봄은 그가 준비해둔 수프를 마시며 거울을 봤다. 어제보다 한결 생기 도는 얼굴, 그리고 목덜미에 살짝 남은 붉은 흔적.

"아, 미쳤어! 이건 어떻게 가려!"

봄은 서둘러 컨실러를 덧바르고, 어제보다 더 꼼꼼하게 셔츠 깃을 세웠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홍보 대행사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에서의 비밀 연애라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짜릿한 서바이벌이.

회사 로비에 들어설 때부터 봄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밖에 모르는 팀장이다'라는 아우라를 뿜어내며 사무실에 들어섰지만, 책상에 앉기도 전에 김 대리가 다가왔다.

"팀장님! 어제 미팅 늦게 끝났나 봐요? 목소리가 좀 잠기신 것 같은데?"

"아... 네. 업체 분들이 워낙 열정적이셔서 토론이 길어졌어요. 목이 좀 칼칼하네요."

봄은 짐짓 서류를 뒤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 사무실 입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차은호 대표의 출근이었다. 평소처럼 완벽한 수트 차림에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어젯밤 자신의 곁에서 속삭이던 그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었다.

은호는 봄의 책상 앞을 지나가며 아주 짧게 멈춰 섰다.

"이 팀장, 어제 보고한 기획안 수정본 내 방으로 바로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공적인 말투, 사무적인 눈빛. 하지만 은호가 돌아서는 찰나, 그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오직 봄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신호였다. 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표실 문을 닫자마자, 봄은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연기 너무 잘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짜 무서웠거든요."

책상에 앉아 있던 은호가 의자를 돌려 봄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달콤하게 변해 있었다.

"무서웠다니 섭섭하네. 난 아침부터 이 팀장 보고 싶어서 미팅도 하나 취소하고 기다렸는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프는 먹었어?"

"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요리까지 잘하시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말했잖아. 난 내 여자한테는 최고만 주고 싶다고."

은호는 봄의 셔츠 깃을 살짝 들춰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잘 가렸네. 하지만 내 눈에는 다 보여. 어제 내가 남긴 흔적들."

"대표님! 진짜...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요!"

봄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은호는 오히려 그녀를 더 꽉 끌어당겼다.

"걱정 마. 문 잠갔어. 그리고 5분만 이러고 있자. 오늘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충전이 필요하거든."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던 그때, 갑자기 대표실 문 손잡이가 거칠게 돌아갔다. 덜컥, 덜컥.

"대표님? 저 홍보실 최 이사입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봄은 소스라치게 놀라 은호를 밀쳐내고 소파 끝으로 날아가듯 앉았다. 은호는 태연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 잠금 장치를 풀었다.

"아, 최 이사님. 무슨 일이죠? 회의 중이었는데."

최 이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방 안을 훑었다. 소파에 앉아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서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봄과, 지나치게 여유로운 은호.

"아, 이 팀장도 여기 있었군. 아니, 문은 왜 잠그고 회의를 하나? 요즘 사내 보안이 그렇게 철저해졌나?"

"중요한 브랜드 런칭 전략이라 외부 유출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계속하시죠."

은호의 능구렁이 같은 대처에 최 이사는 큼큼거리며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봄은 이미 등 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비밀 연애의 스릴이란 이런 것이었다. 심장이 쫄깃해지다 못해 멈춰버릴 것 같은 공포.

최 이사가 나간 뒤, 봄은 도망치듯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최 이사보다 더 무서운 '의외의 복병'이었다.

"어머, 이봄 팀장님 아니세요?"

화려한 트위드 셋업을 입고 로비에 서 있는 한 여자.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최대 광고주이자, 재계에서 미모와 실력으로 유명한 '성진 그룹'의 막내딸, 서지안 전무였다. 그녀는 차은호 대표의 유력한 정략결혼 상대로 늘 기사에 오르내리는 인물이었다.

"아, 서 전무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약속이 있으신 줄 몰랐는데."

봄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지안은 화사하게 웃으며 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은호 오빠 보러 왔죠. 오늘 같이 점심 먹기로 했거든요. 아, 참! 이 팀장님한테도 고마워요. 저번에 우리 브랜드 홍보 기획안, 은호 오빠가 이 팀장님 칭찬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은호 오빠'라는 단어가 봄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 어젯밤 자신을 안아주던 그 남자를 지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대표님이 과찬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에이, 겸손하시긴. 아무튼 저 들어갈게요. 오빠 기다리겠다!"

지안은 향수 냄새를 흩날리며 당당하게 대표실로 향했다. 봄은 그 뒷모습을 보며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지안은 은호와 같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저 그의 유능한 직원에 불과하다는 현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사무실로 돌아온 봄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점심시간이 되자, 은호와 지안이 함께 웃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은호는 지나가며 봄과 눈을 맞추려 했지만, 봄은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서류에만 집중했다.

'바보 같아, 이봄. 고작 이런 일로 질투나 하고.'

오후 내내 봄은 업무에 매달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그때, 메신저가 깜빡였다.

[차은호 대표: 점심은 먹었어? 서 전무는 비즈니스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거야. 오해하지 마.]

오해하지 말라는 그 짧은 말이 오히려 봄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오해할 자격이라도 있는 걸까? 그들은 아직 아무런 공식적인 관계도 아니었다.

퇴근 무렵, 사무실 직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봄만 남았을 때, 은호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봄의 책상 위에 작은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사과의 의미.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이길래 점심 내내 마음이 안 좋았어."

상자를 열어보니 봄이 평소 갖고 싶어 했던 한정판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전 전무님이랑 대표님 사이 오해 안 해요. 두 분 잘 어울리시더라고요."

봄의 가시 돋친 말에 은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봄의 의자를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이봄, 나 봐."

"바빠요. 기획안 마무리해야 돼요."

"나 보라고 했어."

강압적인 말투에 봄이 고개를 들자, 은호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서지안은 그냥 광고주일 뿐이야. 나한테 '여자'는 어젯밤부터 이봄 하나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줘야 알아들어?"

"하지만 전무님은 대표님을 오빠라고 부르고, 두 분 집안끼리도..."

"그건 그쪽 입장이지 내 입장이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건 내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내 밤을 훔쳐간 이 팀장뿐이야. 알겠어?"

은호는 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얹었다.

"느껴져? 여기서 이렇게 뛰고 있는 거. 서지안이랑 밥 먹을 땐 한 번도 안 이랬어. 당신 앞에서만 이러는 거야."

그의 진심 어린 눈빛과 뜨거운 체온에 봄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녀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찔끔 흘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들 다 멀리하세요. 아니면 저 진짜 회사 그만둘 거예요."

"알았어. 다 접근 금지 시킬게. 그러니까 울지 마. 내 마음이 더 아프니까."

은호는 봄을 다정하게 달래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사무실 밖에서 잊고 간 물건을 찾으러 온 김 대리가 반쯤 열린 문틈으로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입을 벌린 채 서 있다는 사실을.

사내 연애의 진정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제7화: 김 대리의 입단속과 소문의 시작

정적이 흐르는 사무실 복도. 반쯤 열린 대표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고,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던 차은호 대표가, 일밖에 모르는 기계라 불리던 이봄 팀장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아주고 있다니.

잊고 간 차 키를 찾으러 몰래 돌아왔던 김 대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방망이질 쳤다. 평소 '연애는 사치'라며 팀원들의 연애 상담조차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 분석하던 이 팀장과, 여자라고는 오직 숫자로 환산되는 비즈니스 파트너 외엔 쳐다보지도 않던 차 대표의 조합이라니. 이건 사내 게시판을 뒤흔들다 못해 회사의 주가를 요동치게 할 만한 특급 뉴스였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설마 내가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을 너무 많이 해서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아니면 대표님이 사실은 이 팀장님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김 대리는 공포와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복도에 놓인 대형 화분을 살짝 건드렸다. 드르륵. 카펫 위에서 바퀴가 구르는 작은 소리였지만, 폭풍 전야 같은 정적 속에서는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복도를 울렸다.

"누구야?"

은호의 날카롭고 서늘한 목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오자마자, 김 대리는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전력 질주로 비상계단을 향해 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1층 로비까지 내려온 그는 숨을 헉헉거리며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때려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남은 얼얼한 통증이 방금 본 광경이 100% 실화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봄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했다. 어제 은호의 품 안에서 느꼈던 안도감과 달콤함도 잠시, 혹시라도 누군가 우리를 봤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밤새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자신은 분명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마음가짐은 이미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봄은 가장 먼저 김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으면 "팀장님, 굿모닝!"이라며 활기차게 인사했을 김 대리가 오늘따라 봄의 눈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둥지둥 서류 더미에 코를 박았다.

"김 대리님, 오늘 꽤 일찍 왔네요? 평소보다 부지런한데요?"

봄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김 대리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아, 네! 네! 팀장님! 그냥... 요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하하하, 대표님도... 아니,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 대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엔 먼저 꺼내지도 않던 '대표님'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 멈추는 모습. 봄의 예리한 직감이 위험 신호를 요란하게 보내왔다.

'확실해. 어제 본 거야. 이 입 가벼운 김 대리를 어쩌면 좋지?'

봄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김 대리의 책상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압박 수사를 하는 취조관처럼 그녀의 그림자가 김 대리의 책상을 덮었다.

"김 대리님, 혹시 어제 퇴근하고 다시 회사 들렀어요? 내가 두고 간 게 있어서 찾아보려 했는데, 누가 다녀간 흔적이 있더라고."

"아뇨! 절대요! 저 어제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순간 이동해서 밤새 넷플릭스만 봤습니다! 정말입니다, 팀장님! 저 믿으시죠?"

지나치게 과장된 부정과 절박한 눈빛은 긍정보다 더 확실한 자백이었다. 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 대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김 대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그는 애꿎은 마우스만 딸깍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오전 내내 사무실의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 대리는 평소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업무에만 매진했고, 팀원들은 그런 김 대리의 눈치를 보며 "김 대리님 오늘 어디 아픈 거 아냐?"라며 수군거렸다. 봄은 좌불안석이었다. 차라리 김 대리가 시원하게 불어버렸다면 대책이라도 세우겠는데, 저렇게 시한폭탄처럼 앉아 있으니 피가 말랐다.

점심시간 직전, 봄의 책상 위 휴대폰이 웅 하고 진동했다.

[차은호 대표: 옥상으로 와. 5분 뒤에. 아무도 모르게.]

봄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계단을 이용해 숨 가쁘게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문을 열고 나가자, 은호가 난간에 기대어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회사에서 이렇게 따로 만나면 위험하다니까요.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김 대리, 어제 본 거 확실해. 내 방에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거든. 그 친구가 평소에 쓰는 지독한 냄새 말이야."

은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봄의 가슴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요? 김 대리님이 본 거라면 이제 끝난 거 아니에요? 내일이면 전 직원이 다 알게 될 텐데... 제 커리어는 어떡하고요."

"걱정 마. 내가 이미 손 써놨으니까. 내 방식대로."

은호가 여유롭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손을 쓰다니요? 설마 돈으로 매수하셨어요? 아니면 무서운 사람들 시켜서 협박이라도..."

"협박이라니, 비즈니스적인 파격 제안을 한 거지. 오늘 아침 일찍 김 대리를 내 방으로 불렀어. 그리고 이번 'K-글로벌 리브랜딩' 프로젝트의 서브 PM 자리를 제안했지. 승진 가산점이 가장 높게 붙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로."

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차은호다웠다. 공포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보상으로 입을 막고, 동시에 성과까지 뽑아내는 방식.

"그럼 김 대리님이 알았다고 하던가요?"

"거의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더군. 자기가 본 건 인류 최후의 비밀보다 더 엄격하게 지키겠다더군. 비밀 유지 위약금 조항까지 넣은 계약서에 서명도 했고. 하지만 이봄, 문제는 내부만이 아니야."

은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는 봄의 어깨를 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서지안 전무 쪽에서 우리 사이를 캐고 다니는 모양이야. 어제 그 여자가 회사에 왔던 건 단순히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소문을 확인하러 온 탐색전이었던 거지. 그 여자의 정보력은 우리 상상 이상이야."

봄은 어제 지안의 화사한 미소 뒤에 숨겨진 서늘하고 탐욕스러운 눈빛이 떠올랐다. 재벌가 막내딸이자 수완 좋은 사업가인 서지안이 자신이 찜한 차은호를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오후 업무 시간, 우려했던 '소문의 발 없는 속도'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던 봄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타 팀 여직원들의 은밀한 대화를 듣고 발을 멈췄다.

"근데 요즘 대표님이랑 이봄 팀장님 분위기 좀 이상하지 않아? 어제도 두 분이 퇴근길에 같이 차 타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어."

"에이, 설마. 이 팀장님이 어떤 사람인데. 일밖에 모르는 얼음 마녀잖아. 대표님도 눈이 높지, 설마 부하 직원이랑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시겠어?"

"그래도 몰라. 저번에 보니까 대표님이 회의 중에 이 팀장님만 빤히 쳐다보더라고. 눈빛이 아주 꿀 떨어지던데? 두 사람, 분명히 뭐가 있어."

봄은 컵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소문은 근거가 부족해도 자극적인 살을 붙여 빛보다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김 대리의 입은 막았을지 몰라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까지 전 직원의 눈에서 가릴 수는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복도에서 은호와 마주쳤다. 은호는 수많은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평소보다 더 차갑고 엄한 목소리로 봄을 몰아붙였다.

"이 팀장, 지난번 런칭 데이터 분석 수치가 이게 최선인가? 숫자 하나하나가 다 어설퍼. 다시 해서 1시간 내로 내 방으로 가져와. 실망하게 하지 말라고."

은호는 서류 파일을 봄의 가슴팍에 탁 치듯 건네고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갑게 돌아서 갔다. 주변 직원들은 "역시 대표님 무섭다", "이 팀장님 오늘 제삿날이네"라며 수군거렸고, 봄은 당황했지만 이내 은호의 의도를 파악했다. 사람들의 의심을 완전히 돌리기 위한 철저하고도 잔인한 연기였다.

정확히 1시간 뒤, 봄은 수정된 서류를 들고 대표실로 향했다. 문을 닫고 잠금 장치를 누르자마자, 차가웠던 은호의 표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까는 미안했어. 너무 세게 밀쳤나? 마음이 안 좋더군."

그는 봄의 어깨를 소중하게 감싸 안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에요. 덕분에 직원들 의심은 좀 풀린 것 같아요. 다들 대표님이 저를 엄청 미워한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안심하는 분위기더라고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미워해. 당신을 사랑해서 매 순간 참는 게 내 가장 큰 업무인데."

은호는 봄을 책상 위에 살짝 앉히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당신이 정말 힘들어서 못 견디겠으면, 그땐 내가 다 책임지고 전 세계에 공표할 테니까. 내 여자가 눈치 보는 거, 딱 질색이야."

"안 돼요! 지금 밝혀지면 제 10년 커리어는 '대표의 여자'라는 수식어 뒤로 사라진단 말이에요. 저 제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거 대표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봄의 자존심 섞인 고집에 은호는 사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봄의 손등에 깊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알아. 당신이 얼마나 지독한 노력파인지. 그래서 더 완벽하게 지켜주고 싶은 거야. 하지만 이봄, 서지안은 절대 조심해. 그 여자는 자기가 갖고 싶은 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뺏는 타입이니까. 필요하다면 사람 하나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때, 책상 위의 대표 전용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인은 '성진 그룹 서지안 전무'.

은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봄을 더 깊게,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전화... 안 받으셔도 돼요? 중요한 광고주일 텐데."

"지금은 광고주보다 내 품에 있는 당신의 떨림을 진정시키는 게 백배는 더 중요해."

은호의 낮은 목소리가 대표실 안을 가득 채우며 봄의 귓가를 울렸다. 하지만 창밖 너머, 회사를 빠져나가는 검은색 승용차 안에서 서지안은 은호의 건물 12층을 서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누군가로부터 은밀히 전달받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비 내리는 퇴근길, 은호가 자신의 재킷을 봄의 머리 위에 씌워주며 세심하게 차에 태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차은호... 보는 눈이 고작 저 정도였어? 너무 평범해서 실망인데."

지안의 빨간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사내 연애의 달콤함 뒤로, 거대한 먹구름과 피 냄새 나는 음모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봄은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질투와 권력의 칼날이 얼마나 날카롭게 갈려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는지를.




제8화: 서지안의 초대와 화려한 덫

서지안 전무의 초대는 거절할 수 없는 명령과 같았다. 성진 그룹이 주최하는 '예술가 후원의 밤' 자선 파티.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광고주이자 차은호의 오랜 인맥인 그녀가 보낸 초대장은 이봄 팀장의 책상 위에서 날카로운 경고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팀장님, 이거 진짜 가실 거예요? 서 전무님 파티면 급이 다르다던데.”

김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어제의 '입단속 계약' 이후로 봄의 눈치와 은호의 기분을 살피느라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가야지. 우리 회사의 메인 광고주 행사인데, 전략기획팀장이 빠질 순 없잖아.”

봄은 짐짓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은호는 이미 지안의 차를 타고 행사장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공식적인 동행.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파티장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평창동의 대저택을 개조한 갤러리는 정재계 인사들과 연예인들로 북적였다. 봄은 평소 입던 투박한 오피스 룩 대신,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녀의 흰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하는 선택이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봄은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파티장의 정중앙,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 차은호와 서지안이 서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든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은호의 완벽한 턱시도 자태와 지안의 화려한 레드 드레스는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어머, 이봄 팀장님! 정말 오셨네요?”

지안이 봄을 발견하고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은호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봄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흔들렸지만, 이내 냉정한 대표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 행사가 정말 근사하네요.”

“별거 아니에요. 우리 은호 오빠가 이 팀장님 칭찬을 하도 많이 해서, 이런 자리에 꼭 한번 모시고 싶었거든요. 오빠, 그렇지?”

지안이 은호의 팔짱을 자연스럽게 끼며 물었다. 은호는 팔을 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유능한 직원이니까. 이런 자리에서 인맥을 넓히는 것도 업무의 연장선이지.”

‘유능한 직원’. 그 단어가 봄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어젯밤 은밀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안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봄을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지안은 봄을 따로 갤러리 2층의 한적한 테라스로 불렀다.

“이 팀장님, 솔직히 말할게요. 나 돌려 말하는 거 딱 질색이거든요.”

지안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선율이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질 만큼 정적이 흘렀다.

“은호 오빠랑 무슨 사이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지 마요. 내 눈은 못 속여요. 은호 오빠가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낮을 줄은 몰랐는데, 이 팀장님은 꽤 영악한 것 같아. 비 오는 날 대표님 차에 타서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오빠가 정신을 못 차릴까?”

지안이 핸드백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봄의 앞에 던졌다.비 오던 날 은호가 그녀에게 재킷을 씌워주던 그 사진이었다.

“이거, 이사회에 뿌려지면 이 팀장님 커리어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몸으로 기획안 통과시킨 팀장'이라는 꼬리표, 평생 떼기 힘들 텐데.”

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서지안의 공격은 생각보다 훨씬 저질스럽고 직접적이었다.

“전무님, 오해십니다. 저희는 그저...”

“오해? 그럼 여기서 증명해 봐요. 오빠한테 이 팀장님은 그냥 소모품이라는 걸.”

지안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봄의 드레스 위로 샴페인을 천천히 쏟아부었다. 차가운 액체가 가슴팍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 가서 오빠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보지 그래요? 오빠가 과연 사람들 앞에서 당신 편을 들어줄까?”

봄은 젖은 드레스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정말 서지안의 각본대로 되는 것이었다.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나오려던 찰나,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은호와 마주쳤다.

“이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은호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는 젖은 그녀의 옷을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제가 실수로 쏟았어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봄은 그를 지나쳐 가려 했지만, 은호가 그녀의 팔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서지안이지? 그 여자가 그랬지?”

“대표님, 제발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보는 눈이 많아요.”

“상관없어. 내 여자가 모욕당하고 있는데 보는 눈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은호는 자신의 턱시도 재킷을 벗어 봄의 젖은 어깨 위에 거칠게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데리고 다시 파티장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표님! 안 돼요! 멈추세요!”

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호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홀 한복판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봄을 모욕했던 서지안 앞으로 다가갔다.

“서 전무, 내 직원이 옷을 버렸더군. 당신 손이 미끄러졌다고 들었는데.”

은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파티장의 모든 소음을 압도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지안은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은호 오빠. 실수였어. 내가 이 팀장님께 사과하려던 참이었는데...”

“사과는 필요 없어. 대신 나도 실수를 좀 해야겠거든.”

그 순간, 은호는 옆에 있던 웨이터의 쟁반에서 레드 와인 잔을 집어 들어 지안의 발등 위로 쏟아버렸다.

챙그랑!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안의 하얀 구두와 드레스 밑단이 붉은 와인으로 얼룩졌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실수야. 손이 아주 심하게 미끄러졌네. 내 직원이 입은 상처보다 당신 구두가 더 비싸 보이니까, 세탁비는 청구해. 얼마든지 내줄 테니.”

은호는 지안을 경멸어린 눈으로 내려다본 뒤, 굳어버린 봄의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들 똑똑히 들어. 이봄 팀장은 내 최고의 파트너이자,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야. 앞으로 이 사람에게 무례하게 구는 건, 나 차은호에게 도전하는 걸로 간주하겠어.”

파티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은호는 얼어붙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봄을 데리고 당당하게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주차장. 은호는 봄을 조수석에 태우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옆얼굴에서는 여전히 분노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미쳤어요, 정말? 광고주한테 와인을 부으면 어떡해요! 내일이면 기사 나고 난리 날 텐데!”

봄이 참았던 소리를 지르자, 은호가 차를 급히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기사? 광고주? 그딴 게 당신보다 중요해? 서지안 그 여자가 당신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은호는 봄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미안해. 이런 자리에 당신 혼자 두게 해서. 당신이 얼마나 자존심 강한 여자인지 아는데, 내 배경 때문에 모욕당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의 진심 어린 사과에 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실은 너무 무서웠고, 너무 서러웠다. 상류 사회의 벽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던 그 순간, 그가 나타나 세상을 다 적으로 돌리고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대표님...”

“차은호라고 불러. 지금은 네 남자 차은호로 있는 거니까.”

은호는 봄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샴페인 냄새와 달콤한 와인 향이 뒤섞인, 격정적이고도 애틋한 키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파티장 발코니에서 서지안이 증오에 찬 눈으로 떠나가는 그들의 차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 나야.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세무조사 준비해. 그리고 이봄이라는 여자, 뒷조사 싹 다 해서 부모님 정보까지 다 털어와. 내가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지안의 서늘한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달콤한 승리 뒤로, 이제는 비즈니스와 사생활을 넘나드는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봄의 평온했던 삶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제9화: 벼랑 끝에 선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어제의 파티장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까. 차은호의 턱시도 재킷에서 나던 짙은 향기와 입술에 남았던 뜨거운 감촉은 선명한데, 오늘 아침 마주한 현실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울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층 무거웠고, 회사 건물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흡사 총성처럼 들렸다.

출근하자마자 이봄을 맞이한 건 팀원들의 경악 섞인 시선과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사무실 로비의 TV에서는 평소 나오던 경제 지표 대신, 연예와 경제를 교묘하게 섞은 자극적인 가십 채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독]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차은호 대표, 자선 파티서 성진 그룹 서 전무에게 와인 세례? '충격' [집중분석] 파티의 발단은 사내 연애? 무명 팀장을 향한 대표의 빗나간 특권 의식

"팀장님... 이거 보셨어요? 인터넷 커뮤니티는 이미 실시간 검색어 수준이에요. 팀장님 성함만 안 나왔지, '브랜드 전략의 마녀'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비난하고 있어요."

김 대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댓글창은 차은호를 향한 '갑질 비난'과 이봄을 향한 근거 없는 추측으로 가득했다. '몸으로 팀장 자리를 땄다', '꽃뱀의 전형이다'라는 저급한 악플들이 봄의 가슴에 독 묻은 화살처럼 박혔다. 10년 넘게 밤낮없이 일하며 쌓아온 커리어가 단 하룻밤의 스캔들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업무 보세요. 이런 가십에 휘둘릴 시간 없어요. 우리가 흔들리면 서지안 전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겁니다."

봄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마우스를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자동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들이 들이닥쳤다.

"국세청 조사관입니다.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장부 조작 및 탈세 의무 제보로 세무조사 나왔습니다. 전 직원 컴퓨터에서 손 떼세요."

사무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류 뭉치가 압수되고 컴퓨터 하드가 포맷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직원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고, 몇몇은 겁에 질려 울먹였다. 서지안의 경고가 단 몇 시간 만에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성진 그룹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세무 당국과 언론이 동시에 에이스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봄은 참지 못하고 대표실로 향했다. 그곳엔 은호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창밖 도심을 무겁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표님... 아니, 은호 씨."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 밑에는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져 있었지만, 봄을 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왔어? 많이 놀랐지. 밖이 소란스럽더군."

"지금 이게 다 저 때문이잖아요. 회사가 무너지고 있어요. 서 전무님한테 사과하세요. 제가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게요. 제발 은호 씨가 쌓아온 걸 포기하지 마세요."

봄의 목소리가 끝내 젖어 들었다. 자신 때문에 그가 공들여 키운 왕국이 무너지는 걸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은호는 성큼성큼 다가와 봄의 어깨를 으스러질 듯 꽉 쥐었다.

"이봄, 똑똑히 들어.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서지안은 원래 자기가 갖지 못하는 건 부숴버리는 여자고, 나는 내 여자를 지킨 대가를 기꺼이 치르는 것뿐이야. 세무조사? 털어도 나올 거 없어. 내가 이 바닥에서 정직 하나로 어떻게 버텼는데. 그딴 장부 조작 따위로 나를 무너뜨릴 순 없어."

"하지만 광고주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있잖아요! 아까 홍보팀 보고 들으셨잖아요. 메인 업체 세 곳이 벌써 계약 해지 통보해왔다고요!"

"돈은 다시 벌면 돼. 하지만 당신 자존심 짓밟힌 건 어떤 수천억으로도 복구 안 돼. 난 어제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야. 아니, 와인이 아니라 내 심장을 던져서라도 당신을 지켰을 거야."

은호의 처절한 진심에 봄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은호의 비서가 문도 두드리지 못하고 다급히 들어왔다.

"대표님, 성진 그룹에서 보낸 공문입니다. 우리 회사에 빌려준 단기 차입금 500억을 즉시 상환하라고 합니다. 담보 가치가 하락했다는 억지 명분입니다. 기한은 이번 주 금요일 오후 4시까지입니다."

500억. 아무리 업계 1위 대행사라도 당장 며칠 만에 마련할 수 있는 현금이 아니었다. 서지안은 단순히 은호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성 자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봄은 은호 몰래 서지안을 찾았다. 화려한 호텔 라운지에서 마주한 지안은 우아하게 홍차를 마시며 봄을 비웃듯 맞이했다.

"어머, 발로 차도 안 나가던 이 팀장님이 웬일일까? 은호 오빠 몰래 여기까지 기어 온 걸 보니 상황이 급하긴 한가 봐?"

"전무님, 원하시는 게 제 파멸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직서 지금 쓰겠습니다. 대표님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혈서라도 쓰라면 쓰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회사는 건드리지 마세요."

봄은 무릎을 꿇기 위해 다리를 굽히려 했다. 하지만 지안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봄의 턱을 치켜올렸다.

"사직서? 이봄 씨, 상황 파악이 아직 안 돼? 이제 이건 단순히 연애 놀음이 아니야. 내 자존심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지 전 국민에게 보여주는 본보기가 필요한 거거든. 500억, 오빠가 못 갚으면 에이스는 법정 관리 들어가고 내 손에 넘어와. 그럼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이 뭘 것 같아? 당신을 이 바닥에서 영원히 매장하는 건 물론이고, 당신 가족들 신상까지 털어서 숨도 못 쉬게 만드는 거야."

지안의 서늘한 광기에 봄은 전율했다. 이 여자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정복욕과 파괴욕으로 움직이는 괴물이었다.

"전무님도 한때 은호 씨를 좋아하셨잖아요. 그가 평생 일궈온 모든 것을 부수는 게 정말 사랑인가요?"

"사랑? 아니, 난 소유하고 싶은 거야. 망가뜨려서라도 내 발밑에 두는 거, 그게 내 방식이야. 그러니까 이봄, 얌전히 구경이나 해. 잘난 차은호가 어떻게 밑바닥까지 추락하는지."

라운지를 빠져나온 봄은 하염없이 밤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지만, 가슴속의 자책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비서한테 다 들었어. 서지안 만났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지만, 그 밑에 깔린 절박한 걱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봄은 눈물을 훔치며 간신히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모욕만 당하고 온 것 같아요. 저 때문에 대표님이..."

[지금 당장 내 집으로 와. 당신 없으면 나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

 

봄이 은호의 집 거실에 들어섰을 때, 집안은 무거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테라스에서 타오르는 담배 불빛과 함께 은호의 실루엣이 보였다. 봄이 다가가자 그는 담배를 끄고 그녀를 말없이, 아주 강하게 끌어안았다.

"바보같이 왜 거길 가. 내가 당신 하나 못 지킬 만큼 무능해 보여?"

"500억이잖아요... 그 돈을 어떻게 며칠 만에 구해요. 제가 사퇴하고 떠나면 서 전무도 멈출지 몰라요."

"쉿. 그 말 금지라고 했지. 오늘 밤은 그냥 나랑 있어줘. 500억보다 당신의 이 눈물 한 방울이 나한테는 수만 배 더 아프니까."

은호는 봄의 젖은 눈가를 입술로 조심스럽게 닦아내고는 그녀의 입술을 깊게 삼켰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누는 키스는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고 달콤했다. 서로의 체온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거칠게 서로를 갈구했다. 셔츠 단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지만,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은호는 평소보다 더 완벽하게 정장을 차려입었다. 눈빛은 어제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오늘부터 진짜 전쟁이야. 당신은 당신 자리를 지켜. 나는 내 회사를 지킬 테니까. 서지안이 놓친 게 하나 있는데, 에이스의 진짜 가치는 '성진의 돈'이 아니라 나 '차은호'라는 브랜드 자체거든."

은호의 선언과 함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성진 그룹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다른 대기업 회장들을 찾아다니며 은밀하게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한편, 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서지안이 그동안 광고주라는 지위를 이용해 대행사 직원들에게 저질러온 갑질 증거들과, 해외 비자금 관련 정황들을 비밀리에 수집하기 시작했다. 파티장에서의 와인 사건뿐만 아니라, 녹취록, 메시지 등 서지안의 화려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추악한 민낯을 드러낼 카드를 준비한 것이다.

"팀장님, 이거 정말 공개하실 거예요? 이건 성진 그룹 전체랑 싸우겠다는 건데..."

자료를 정리하던 김 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봄은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대표님은 회사를 지키고 계시잖아. 나는 내 남자를 지켜야지. 서지안이 건드린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알려줄 거야."

그때, 은호의 집무실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은호가 서지안의 차입금을 한 번에 상환하고도 남을 해외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봄이 퇴근하는 길을 검은 선글라스를 낀 괴한들이 가로막았다.

"이봄 팀장님? 서 전무님이 잠시 좀 뵙자고 하시네요. 조용히 타시죠."

어두운 골목, 봄의 비명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고, 그녀가 들고 있던 가방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제10화: 분노의 추격전과 반격의 서막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이봄의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무심하게 울려댔다. 액정에는 '차은호'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지만, 전화를 받아야 할 주인은 이미 검은색 카니발 차량에 강제로 태워진 뒤였다. 거친 손길에 입이 틀어막힌 봄은 공포로 가득 찬 눈을 가늘게 떴다.

"조용히 해. 소리 질러봤자 도와줄 사람 없으니까. 네가 고분고분해야 차 대표님도 무사할 거야. 괜히 반항하다가 얼굴이라도 상하면 네 손해지, 안 그래?"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비릿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낮게 읊조렸다. 차는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서울 외곽으로 속도를 높였다. 봄은 손목이 케이블 타이에 묶인 채로 차창 밖을 보려 애썼지만, 짙은 썬팅은 외부와의 소통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그녀는 남몰래 주머니 속에 있던 스마트 워치의 긴급 버튼을 더듬거렸다. 차은호의 번호로 자신의 위치 정보가 전송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같은 시각, 투자 유치 성공의 기쁨을 나누려 봄에게 전화를 걸던 은호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수십 번의 신호음 끝에 들려오는 건 기계적인 안내 멘트뿐이었다. 평소 업무 처리에 철저한 봄이 자신의 전화를 이렇게 오래 받지 않을 리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예리한 칼날처럼 그의 목을 겨누었다.

은호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여 곧장 기획팀 사무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곳엔 꺼진 모니터와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야근 중이던 김 대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은호를 맞이했다.

 

"이 팀장 아직 퇴근 안 했나? 아니면 어디 들렀나?"

"어? 팀장님 아까 서류 챙겨서 퇴근하셨는데요. 대표님 댁으로 바로 가신 거 아니었어요? 아까 나갈 때 표정 되게 밝으셨는데..."

그 순간 은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GPS 추적 앱을 켰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봄의 휴대폰에 공유 설정을 해두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화면 위의 빨간 점은 회사 근처 어두운 골목에서 멈춰 있었다.

은호는 폭풍처럼 주차장으로 달려 내려갔다. 자신의 스포츠카 시동을 걸자마자 굉음이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급가속을 한 그가 빨간 점이 있는 골목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봄의 가방과 흩어진 서류들이었다. 그리고 아스팔트 위에는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인 듯한 신발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서지안... 이 미친 여자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

은호는 운전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분노로 눈앞이 붉게 타올랐다. 그는 즉시 개인 비서와 보안팀에게 전화를 걸어 성진 그룹 소유의 안가와 서지안의 이동 경로를 1분 단위로 파악하라고 명령했다.

"경찰을 부를까요, 대표님?" 비서의 물음에 은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니, 내가 직접 간다. 경찰 부르면 서지안은 법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구멍부터 만들 테니까. 내 여자를 건드린 대가가 어떤 건지, 내가 직접 그 여자의 숨통을 조여주지. 당장 위치 찍어."

봄을 납치한 카니발 차량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의 폐쇄된 가구 창고였다. 서지안은 우아하게 명품 의자에 앉아, 낡은 의자에 결박된 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안의 손에는 봄이 수집했던 갑질 증거 자료들이 들려 있었다.

"이봄 씨, 표정이 왜 그래? 오빠가 금방 올 텐데 반가워해야지. 이까짓 종이 쪼가리로 나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주제 파악 좀 하지. 네가 은호 오빠 옆에 있는 것 자체가 오점이라는 걸 왜 몰라?"

지안이 자료를 봄의 얼굴에 내던지며 비아냥거렸다. 종이 날카로운 모서리에 봄의 뺨이 살짝 긁혀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지안이 봄의 입을 막은 테이프를 거칠게 떼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전무님, 이런 짓까지 해서 얻는 게 뭐죠? 이건 사랑이 아니라 추악한 독점욕일 뿐이에요. 대표님이 당신을 더 끔찍하게 증오하게 만들 뿐이라고요! 이럴수록 대표님은 당신에게서 더 멀어질 거예요."

"증오? 증오도 감정의 일종이지. 무관심보다는 백배 나아. 나를 미워해서 평생 나를 잊지 못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오늘 오빠가 여기서 당신을 구하려고 애쓰는 추한 꼴을 영상으로 찍어서 보낼 거야. '차은호 대표, 여자에 미쳐 납치 자작극 연출' 같은 헤드라인 어때? 당신 하나만 망가지면 끝날 일이 아니야. 은호 오빠의 명예까지 내가 통째로 씹어 삼켜줄 테니까."

지안의 목적은 명확했다. 봄을 미끼로 은호의 사회적 신용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것.

그때, 창고 정문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부서지듯 열렸다. 서치라이트보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두운 창고 안을 잔인하게 비췄고, 그 사이로 차은호가 걸어 들어왔다. 수트 상의는 어디에 벗어던졌는지 셔츠 차림이었고, 단정한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의 냉정함은 온데간데없는, 굶주린 야수와 같은 눈빛이었다.

"서지안, 거기서 당장 떨어져.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은호의 목소리는 지옥 밑바닥에서 올라온 듯 낮고 무거웠다. 지안이 고용한 건장한 사내 셋이 앞을 가로막았다. 은호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수년 동안 취미로 다져온 복싱과 격투기 실력이 실전에서 폭발했다.

은호의 정교한 레프트 훅이 첫 번째 사내의 턱에 꽂혔다.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나머지 둘이 동시에 달려들자 은호는 몸을 낮춰 태클을 피하고, 그대로 한 명의 복부를 강타한 뒤 팔꿈치로 등 뒤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마지막 사내가 흉기를 꺼내려 하자, 은호는 자비 없는 발길질로 그의 손목을 걷어찼다.

치열한 몸싸움 끝에 사내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은호의 손등 뼈 마디는 거친 타격으로 인해 살점이 터져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직 시선은 의자에 묶여 공포에 질린 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은호는 떨리는 손으로 봄의 결박을 풀었다. 케이블 타이가 끊어지자마자 그는 봄을 부서질 듯 품에 안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마치 폭주하는 기차처럼 거칠었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내가 당신을 사지로 몰아넣었어. 미안해, 이봄. 정말 죽을 만큼 미안해."

봄은 은호의 피 묻은 손을 잡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의 셔츠가 그녀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은호는 그녀를 뒤로 보호하며 서지안을 노려봤다. 지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서지안, 네가 방금 저지른 건 비즈니스가 아니야. 추악한 범죄지. 성진 그룹의 막내딸이 납치 교사를 했다는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 이미 내 보안팀이 확보해서 검찰청과 방송국에 동시에 뿌렸어. 네가 좋아하는 '이목 집중', 제대로 시켜주지. 네 인생 최고의 쇼가 될 거야."

지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화려하게 치장했던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뭐? 거짓말하지 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내가 누군지 잊었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지금 네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비서실 전화를 받아보면 알겠지. 그리고 500억? 오늘 오후에 해외 투자금으로 전액 상환 완료했어. 이제 너랑 나 사이에 남은 건 법적인 처벌뿐이야. 두 번 다시 내 여자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때는 정말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은호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지안을 뒤로한 채, 봄을 안아 들고 당당하게 창고를 빠져나왔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봄은 은호의 상처 입은 손을 꽉 쥐었다. 은호의 손등 마디마디에서는 여전히 핏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은호 씨, 손이 이게 뭐예요...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피를 흘리고..."

"당신이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까 됐어. 당신 잃는 줄 알고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 상처가 무슨 상관이야. 차라리 내가 대신 다치는 게 나아."

은호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봄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뺨에 남은 붉은 자국을 발견하자 그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짙은 분노와 애정으로 일렁였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더 강해질게. 누구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게. 이 세상 모든 적들로부터 당신을 지킬 거야. 약속해."

은호는 봄을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연인들이 나누는 키스는 그 어느 때보다 처절하고 뜨거웠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다음 날, 세상은 발칵 뒤집어졌다. 서지안 전무의 납치 교사 혐의와 성진 그룹의 갑질 폭로가 전 언론을 도배했다. 봄이 준비했던 증거 자료들과 은호가 확보한 현장 영상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지안은 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다.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주가는 보란 듯이 반등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은호의 집무실에 한 노신사가 예고 없이 나타났다. 은호의 아버지이자, 오직 기업의 결합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냉혈한, 차승만 회장이었다. 그는 서지안과의 파혼과 구속 사태로 인해 성진 그룹과의 거대한 합병 계획이 무산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지팡이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집무실 전체에 위협적으로 울렸다.

"지안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게 정말 저 여자 때문이냐? 네가 고작 저런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내 평생의 숙원이었던 성진과의 합병을 망쳐? 네가 제정신이냐!"

차 회장은 소파에 앉아 있는 봄을 벌레 보듯 경멸 어린 눈으로 훑었다. 그 위압감에 봄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이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범죄였습니다. 저는 제 사람을 지킨 것뿐입니다. 성진과의 합병이 범죄를 덮어가며 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입니까?"

"네 사람? 네 사람은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직원들이지, 저런 근본 없는 여자가 아니다. 당장 저 여자를 내 눈앞에서 치워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네가 가진 모든 지위와 권력을 회수하겠다. 이 회사도, 네 이름 석 자도 내 손안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내 아들이라도 내 계획을 방해하는 건 용납 못 해."

은호와 봄의 사랑 앞에, 이제는 '가문의 압박'과 '정략결혼'이라는 더 거대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호는 봄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아버지의 서슬 퍼런 눈빛에 맞섰다. 이제부터는 진짜 '권력'과의 싸움이었다.




제11화: 차 회장의 비열한 제안과 봄의 결단

 

차승만 회장이 머물다 간 집무실에는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그가 내뱉은 “근본 없는 여자”라는 말은 이봄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대한민국 광고계를 주름잡는 유능한 팀장으로 불리며 수많은 성공 신화를 써 내려왔던 그녀였지만, 재계의 거물 앞에서는 그저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천박한 방해물’에 불과했다. 창밖으로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가 사무실의 정적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이봄, 아버지 말씀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 그 노인네가 가진 권력, 생각보다 구멍이 많거든.”

은호가 봄의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봄은 그의 따뜻한 품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의 손등 뼈 마디에 남은, 어제의 격투로 터진 붉은 상처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휘둘렀던 그 주먹, 그리고 그 대가로 돌아온 아버지의 싸늘한 노여움과 회사의 위기.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지켜줘야 할 존재’를 넘어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대표님... 아니, 은호 씨. 회장님 말씀이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닐지도 몰라요. 저 때문에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이 성진 그룹이라는 거대한 파트너를 잃었고, 이제는 회장님의 직계 압박까지 받게 됐잖아요. 그건 비즈니스적으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요. 당신이 10년 넘게 밤잠 설쳐가며 쌓아올린 이 성이 무너지는 걸 내가 어떻게 봐요?”

“손실? 그런 건 다시 벌어들이면 그만인 숫자에 불과해. 하지만 이봄, 널 잃는 건 내 인생의 중심축이 무너지는 거야. 내 가치를 결정하는 건 우리 아버지의 자본도, 성진 그룹의 배경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야. 나를 못 믿겠어?”

은호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단호했다. 그러나 봄은 알 수 있었다. 차 회장은 서지안처럼 감정적으로 폭주하며 빈틈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은호가 가진 사회적 기반을 하나씩 거세하여 그를 고립시키고, 결국 자신의 발밑으로 기어 들어오게 만들 수 있는, 훨씬 더 치밀하고 잔인한 노련한 권력자였다.

다음 날부터 차 회장의 압박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주주들이 갑자기 지분을 매각하겠다며 은호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최종 단계까지 갔던 정부 국책 홍보 사업에서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사무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대표님이 여자 하나 때문에 회장님 눈 밖에 나서 회사가 공중분해 될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

봄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지만,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비서실을 통해 차 회장의 은밀한 호출이 왔다. 은호 몰래, 지극히 사적인 장소로의 초대였다.

서울 시내가 장난감처럼 내려다보이는 특급 호텔 펜트하우스. 차 회장은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날카롭게 울렸다.

“앉게. 길게 말하는 걸 즐기지 않으니 핵심만 하지.”

그의 목소리는 어제처럼 고함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 담긴 살기가 더 큰 위압감을 주었다. 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맞은편에 꼿꼿이 앉았다.

“이 팀장이라고 했나. 자네 기획안 몇 개를 봤네. 꽤 영리하더군. 내 아들이 자네라는 환상에 취해 인생을 걸 만큼 매혹적인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겠고. 하지만 자네가 가진 그 유능함이 내 아들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회장님, 저는 대표님을 망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서로...”

“내 말 끊지 말게. 나는 평생을 이익과 손해라는 계산기 속에서 살아온 사업가네. 이익이 된다면 원수와도 침대에 눕지만, 손해가 된다면 살을 붙여 낳은 자식이라도 도려내는 게 내 방식이야. 지금 은호는 자네라는 값싼 감정에 취해 독약인지도 모르고 들이켜고 있어. 그 독의 끝이 뭔 줄 아나? 에이스의 법정 관리, 그리고 차은호라는 이름의 완전한 매장이네.”

차 회장은 두꺼운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로 가볍게 밀어 던졌다.

“자네가 에이스를 떠나 해외 지사로 나간다면, 에이스에 가해지는 모든 자금 압박을 오늘 이 시간부로 멈추겠네. 자네의 커리어도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해주지. 뉴욕이든 런던이든, 세계 최고의 대행사에서 부사장 급으로 대우받게 해주겠어. 하지만 끝까지 내 아들 곁에서 그 잘난 사랑놀음을 계속하겠다면... 나는 은호를 대표 자리에서 해임하고, 에이스를 산산조각 내서 다른 회사에 헐값으로 넘길 거네. 내 아들이 빈털터리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고, 평생 일궈온 꿈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꼴을 보고 싶은가?”

비열하고도 완벽한 제안이었다. 사랑을 지키면 연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연인의 인생을 지키려면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야 하는 잔인한 외통수. 봄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치마폭을 꽉 움켜쥐었다.

“은호 씨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에요.”

“무너뜨리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자네의 존재네. 자네가 옆에 있는 한, 은호는 끝까지 나와 싸우려 들 테니까. 그 소모적인 전쟁 끝에 내 아들에게 남는 건 너덜너덜해진 상처뿐이야. 정말 은호를 사랑한다면, 무엇이 그 사람의 미래를 위한 길인지 자네 그 영리한 머리로 잘 생각해보게.”

호텔을 빠져나온 봄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걸었다. 우산도 없이 젖어가는 그녀의 어깨 위로 절망이 내려앉았다. 은호에게서 계속 전화가 오고 진동이 울렸지만 그녀는 차마 받지 못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차 회장 앞에서 겨우 버텼던 결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늦게 도착한 은호의 집 앞. 은호는 초조하게 현관 밖을 서성이다가 젖은 생쥐 꼴이 된 봄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듯 달려 나왔다. 그는 자신의 캐시미어 재킷을 벗어 그녀의 차가운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이봄! 대체 어디 갔었어! 연락도 안 되고, 사람 미치게 만들 작정이야? 비는 왜 이렇게 맞고 다니고!”

은호의 화난 듯하면서도 깊은 슬픔이 서린 목소리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봄은 은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오열했다. 은호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차가운 빗속에서 그녀를 부서질 듯 꽉 안아주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어느 정도 진정된 봄은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은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완벽한 수트 차림, 당당한 어깨, 업계를 리드하던 그 빛나는 눈빛. 자신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이 모든 광채가 사라지고 그가 초라한 패배자로 전락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은호 씨, 우리... 잠시 떨어져 지내면 어떨까요?”

봄의 폭탄선언에 은호가 들고 있던 찻잔이 찻받침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 만나고 온 거야? 그 노인네가 협박이라도 했어? 내가 상관없다고 했잖아, 내가 다 막아준다고!”

“아니요, 제가 밤새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에요. 지금은 우리가 함께 있는 게 서로의 숨통을 조이는 독이 되는 것 같아요. 은호 씨가 10년을 바친 에이스가 아버지 손에 분해되는 거, 저 정말 죽어도 못 봐요.”

“에이스 따위, 다시 세우면 돼! 당신만 내 옆에 있으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차은호 대표님!”

봄은 처음으로 그에게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제 이기심 좀 봐주세요. 저도 제 커리어 소중해요. '대표랑 연애질하다가 회사 말아먹은 팀장'이라는 꼬리표 달고 이 업계에서 제가 어떻게 고개 들고 살아요? 전무님 말처럼 제가 당신 앞길 막는 꽃뱀 취급받는 거, 저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요! 저도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저 좀 편하게 보내주세요.”

봄은 마음에도 없는 독한 말들을 칼날처럼 쏟아냈다. 은호의 눈동자가 말도 안 되는 배신감과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는 봄의 어깨를 꽉 잡고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심이야? 정말... 고작 그 평판 때문에 나를 버리겠다는 거야?”

“네. 진심이에요. 이제 지쳤어요.”

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은호는 한참 동안 봄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떨리고 있었다.

“알았어.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이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지옥 같다면 내가 물러날게. 하지만 이건 알아둬. 내가 널 포기하는 게 아니라, 네가 우리 사이를 믿지 못하는 거야. 우리가 이 폭풍을 함께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네가 끝내 외면한 거라고.”

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고, 봄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막고 비명 같은 오열을 쏟아냈다.

 

다음 날 오전,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사내 게시판에는 ‘이봄 팀장 해외 연수 발령’ 소식이 긴급 공고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해외 네트워크 확장을 위한 포상 연수였지만, 전 직원은 직감했다. 차 회장의 승리이자, 두 연인의 처참한 이별이라는 것을.

봄은 텅 빈 사무실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왔다. 직원들의 동정 어린 시선과 수군거림을 뒤로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멀리 복도 끝에서 은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상처 입은 짐승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봄은 짧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 로비를 나섰다. '미안해요, 은호 씨.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당신을 버리는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봄은 몰랐다. 은호가 그녀를 순순히 보낸 것이 결코 포기가 아니었음을. 그는 봄이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은 즉시, 비밀 금고에서 차 회장의 비자금 장부와 성진 그룹과의 불법 유착 관계가 담긴 외장 하드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 봄이를 건드린 대가는 아버지가 목숨처럼 아끼는 그 ‘성진과의 합병’과 ‘성진 그룹’ 자체의 몰락이 될 겁니다. 이제부터 아들이 아닌, 당신을 무너뜨릴 가장 잔인한 적수로 서겠습니다.”

은호의 눈에는 봄을 잃은 슬픔보다 더 거대한, 차가운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한편, 공항으로 향하던 봄의 택시가 외진 도로에서 낯선 검은 차 한 대에 의해 가로막혔다. 차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구속 수사 중인 줄 알았던 서지안의 심복이었다.

“이봄 팀장님, 전무님께서 출국 전 마지막으로 전하실 ‘선물’이 있다고 하시네요. 같이 가주시죠.”

봄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며 다시 한번 불길한 전율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제12화: 은호의 반격과 뒤바뀐 운명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 안, 이봄은 창밖으로 흐릿하게 멀어지는 서울의 풍경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아냈다. 차은호라는 세계에서 도망치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숨이 막혔다.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졌지만,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죄책감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탄 택시가 외곽 도로의 한적한 구간, 가로등조차 듬성듬성한 어두운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뒤따라오던 검은색 세단 두 대가 타이어 비명 소리를 내며 택시의 앞뒤를 잔인하게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에요! 기사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택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건장한 사내들이 봄의 팔을 낚아채 강제로 차 밖으로 끌어내렸다. 공포로 마비된 감각 사이로, 구속된 줄 알았던 서지안의 심복인 최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가로등 불빛이 일렁였다.

"이 팀장님, 전무님께서 작별 인사가 너무 서운하시다며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비행기 티켓은 잠시 잊으시는 게 좋겠군요. 당신이 갈 곳은 뉴욕이 아니라 전무님이 계신 곳이니까요."

"이게 무슨 짓이죠? 서 전무님은 지금 구치소에 있어야 하잖아요!"

"대한민국에서 돈과 권력이면 안 되는 게 있습니까? 전무님은 지병을 이유로 잠시 외부 병원 VIP 병동에 계십니다. 자, 조용히 타시죠. 거칠게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항한다면 이 택시 기사님의 안전은 보장 못 합니다."

최 실장의 협박에 봄은 저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어둠 속에 갇히는 절망감을 느끼며 검은 세단 뒷좌석으로 밀려 들어갔다. 차은호를 지키기 위해 떠나려던 길이, 오히려 그를 다시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함정이 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대표실에 홀로 남은 은호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 사무실, 오직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만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차 회장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성진 그룹과의 유착 관계, 그리고 수십 년간 이어온 비자금 세탁 경로가 상세히 담긴 외장 하드가 놓여 있었다.

은호는 봄을 보냈다는 죄책감과 찢어지는 슬픔을 분노의 연료로 삼아 불태웠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적당히 타협하며 순응하는 나약한 아들이 아니었다.

"비서실, 당장 브리핑 준비해. 성진 그룹의 복잡한 지분 구조 분석 자료랑 우리 측에 설 우호 지분 명단 전부 가지고 들어와. 밤을 새워서라도 끝낸다."

그때, 은호의 개인 휴대폰으로 발신번호 표시 제한의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이봄 팀장의 출국은 취소되었습니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들고 있는 그 하드를 파괴하고 성진 그룹과의 합병안에 서명하세요. 30분 주겠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전송된 사진에는 입이 테이프로 틀어막힌 채 차가운 시멘트 벽에 기대어 있는 봄의 초췌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은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핏발로 가득 찼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부러뜨리며 책상을 내리쳤다.

"서지안... 감히 내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해? 네가 감히 내 여자를 또 건드려?"

하지만 이번의 은호는 지난번처럼 무모하게 몸부터 나가지 않았다. 그는 차 회장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차 회장은 불쾌한 듯 안경을 고쳐 썼다.

"네 놈이 여길 왜 또 오느냐? 그 여자는 이미 공항으로 갔을 텐데. 이제 정리가 좀 된 모양이구나."

차 회장은 여전히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로 은호를 맞이했다. 은호는 말없이 휴대폰에 전송된 사진을 아버지의 책상 정중앙에 던졌다. 사진 속 봄의 처참한 모습을 본 차 회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지안이... 이 미친년. 제정신이 아니군. 감히 내 아들의 여자를 내 허락도 없이 다시 납치해?"

"아버지가 방관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봄이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서지안의 광기를 이용하고 묵인하신 거잖아요! 당신이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떠들던 그 '가문의 명예'가 이런 겁니까?"

은호는 책상 위로 몸을 낮게 기울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부자 관계의 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잘 들으세요, 아버지.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아버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주인이자, 성진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킬 사냥꾼이죠. 여기 이 하드 보입니까? 이 안에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남은 평생을 보내게 할 증거들이 가득합니다. 차승만 회장이라는 이름 석 자가 신문 사회면을 도배하는 꼴, 보고 싶으십니까?"

"네가 감히... 애비인 나를 협박하는 거냐! 네가 누구 덕에 이 자리에 있는데!"

"협박이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거래입니다. 서지안이 숨어 있는 병실 위치, 5분 안에 알아내세요. 그리고 성진 그룹과의 모든 합병안을 백지화하고, 서지안을 영원히 재계에서 매장하는 데 동참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하드의 모든 데이터는 10분 뒤 중앙지검 특수부로 전송됩니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왕국을 무너뜨리는 건, 저에게는 이제 일도 아닙니다."

차 회장은 아들의 눈에서 서린 서늘하고도 잔혹한 기운에 압도당했다. 자신이 알던 순종적인 아들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된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결국 차 회장은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한편, 봄은 병원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VIP 병동 지하 밀실에 갇혀 있었다. 서지안은 환자복 위에 고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미친 듯이 웃으며 봄의 뺨을 서늘한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이봄, 억울해?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은호 오빠의 배경을 절대 감당 못 해. 차 회장님도 결국 내 편이야. 넌 그냥 우리 상류층 비즈니스의 소모품일 뿐이라고. 주제를 알았어야지."

"전무님은 참 불쌍한 분이네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딸이면서도, 정작 은호 씨의 진심 어린 마음 한 조각도 얻지 못해서 이런 저질스러운 짓까지 하시니. 당신이 가진 건 껍데기뿐이에요."

봄의 담담한 도발에 지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발작적인 분노가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이게 끝까지...! 죽여버릴 거야, 너 같은 건 없어져도 아무도 몰라!"

지안이 봄의 목을 조르려 손을 뻗던 찰나, 지하실의 육중한 철문이 엄청난 충격과 함께 부서지듯 열렸다. 은호였다. 그는 차 회장의 개인 보안팀을 이끌고 지안의 밀실을 덮쳤다. 은호는 단숨에 지안을 밀쳐내고 봄의 결박을 칼로 끊어냈다.

"이봄! 괜찮아? 대답해 봐!"

은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봄은 은호의 품에 안기며 안도감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귀에 천둥처럼 울렸다. 은호는 봄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일으킨 뒤, 바닥에 주저앉아 히스테릭하게 웃는 서지안을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서지안, 넌 오늘부로 끝이야. 너희 집안은 물론이고 너를 도운 그 잘난 배경들, 내가 하나하나 다 씹어 먹어줄게. 감옥 안에서 네가 가진 모든 게 모래성처럼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봐. 그게 내가 주는 마지막 인사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은호의 '반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약속대로 차 회장을 당장 검찰에 넘기지는 않았지만,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을 성진 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켰다. 또한 차 회장의 경영권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이사회 결의안을 기어이 통과시켰다.

며칠 뒤, 은호의 집 거실.

봄은 해외로 떠나지 않았다. 대신 은호의 옆에서 그가 벌이는 거대한 전쟁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은호는 거실 소파에 깊숙이 앉아 봄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나직이, 그러나 서늘하게 말했다.

"이제 누구도 우릴 갈라놓지 못해. 아버지도, 성진도... 내가 다 무너뜨렸으니까. 그들이 우리를 괴롭혔던 그 방식 그대로 갚아줄 거야."

"은호 씨,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회장님은 그래도 아버님이신데... 마음이 편치 않으실까 봐 걱정돼요."

"아니, 그분은 나에게서 너를 빼앗으려 한 시점부터 내 아버지가 아니라 내 적이었어. 이봄, 이제부터 에이스의 실무는 네가 다 맡아. 나는 이 바닥의 판을 새로 짜는 데 집중할 거야. 우리를 멸시했던 그 화려한 상류 사회가 얼마나 추악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차례야."

은호의 눈동자에는 예전의 따뜻한 부드러움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권력욕과 복수심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봄은 그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점점 '괴물'로 변모해가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은호는 봄을 더 깊게 품에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집착 섞인 어조로 속삭였다.

"사랑해.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이 세상 전부를 불태울 수도 있어. 그게 내 방식이야."

그것은 가장 달콤한 고백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선전포고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대한민국 재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대한 전쟁의 심장이 되었다.

그날 밤, 은호의 서재에는 성진 그룹의 최종 부도 소식이 실린 호외 신문이 놓여 있었다. 은호의 복수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고, 봄은 그런 은호의 손을 잡고 돌아올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제13화: 괴물이 된 연인과 위험한 탐닉

성진 그룹의 부도 소식이 대한민국 재계를 뒤흔들며 연일 뉴스 속보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실은 기이할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길게 비쳐드는 붉은 석양은 넓은 집무실을 마치 피처럼 진득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차은호는 이탈리아제 맞춤 수트 상의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거칠게 걷어붙이고 독한 위스키를 얼음도 없이 들이키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몰아내고 성진을 무너뜨린 남자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고도 치명적으로 섹시했다. 셔츠 위로 은근하게 드러난 탄탄한 근육과, 분노와 승리감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이제 완벽한 상위 포식자의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대표님, 아니... 은호 씨. 아직 안 들어갔어요? 직원들은 거의 다 퇴근했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고 이봄이 들어왔다. 그녀 역시 하루 종일 이어진 격무 탓인지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셔츠 단추가 두 개나 풀려 가녀린 쇄골 라인이 드러나 있었다. 은호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봄의 입술에서부터 목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이리 와, 이봄.”

낮게 가라앉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 애절한 갈구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봄이 자석에 이끌리듯 다가가자, 은호는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자신의 무릎 위로 거칠게 앉혔다. 갑작스러운 육체적 접촉에 봄의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은호 씨, 여기 회사예요.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아무도 못 들어와. 내가 오늘 밤 이 층 전체를 폐쇄하라고 지시했으니까. 지금 이 건물 안에는 오직 너랑 나, 단둘뿐이야.”

은호의 뜨거운 손바닥이 봄의 허벅지를 타고 천천히 올라와 허리춤에 머물렀다. 얇은 실크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에 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은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성진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주저앉혔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기쁘지 않아. 하루 종일 회의를 하면서도 네 입술만 보였어. 내가 정말 미친 것 같지?”

은호의 손길이 거침없이 봄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차가운 집무실 공기와 은호의 뜨거운 숨결이 교차하며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봄은 그의 목을 팔로 감싸 안으며, 자신을 파고드는 그의 향기에 취해갔다.

“은호 씨, 당신... 정말 나를 지키려고 괴물이 된 거예요? 아니면 원래 이런 남자였던 거예요?”

봄의 떨리는 물음에 은호는 미치도록 섹시하게 웃으며 그녀의 깊게 파인 목선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그래, 괴물이 됐지. 널 다시는 뺏기지 않으려고,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으려고 기꺼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어. 하지만 이 괴물을 유일하게 길들일 수 있는 건 세상에 너 하나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이봄.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은호는 봄을 번쩍 들어 올려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위로 밀어뜨렸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책상 위의 서류들과 펜들이 바닥으로 요란하게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 재계의 판도를 결정짓던 그 중요한 서류들은 이제 두 사람의 격정적인 몸짓 아래 아무런 의미 없는 종이 더미에 불과했다.

은호의 입술이 봄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켰다. 위스키의 쌉싸름한 향과 그의 진한 체취가 뒤섞여 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은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봄의 가슴에 강하게 맞닿았고, 그는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를 자신의 몸 안으로 흡수하려는 듯 강렬하게 몰아붙였다.

“하아... 은호... 씨...”

봄의 신음소리가 정막한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은호는 그녀의 젖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가장 원초적이고도 섹시한 욕망을 드러냈다. 모든 것을 가진 남자가 오직 단 한 여자만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유욕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은호는 봄을 뒤에서 껴안은 채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봤다. 헝클어진 머리와 반쯤 풀린 셔츠 차림의 그는 세상 그 어떤 남자보다 위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성진의 잔당들이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겠지. 하지만 걱정 마. 내 방식대로 그들을 하나씩 밟아줄 테니까. 넌 그저 내 옆에서 가장 안전하고 화려하게 빛나기만 하면 돼.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듣지 마. 오직 나만 봐.”

은호의 말은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집착의 독이 들어 있었다. 봄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가 휘두르는 권력의 칼날이 너무 날카로워 언젠가 두 사람의 관계마저 베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저를 정말 사랑하긴 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당신 옆에 둬야 하는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봄의 질문에 은호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광기에 가까운 애정이 서려 있었다.

“사랑과 소유가 다른 건가? 난 네 영혼의 마지막 조각까지 내 것이길 원해. 네가 다른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웃는 것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널 원해. 그게 내 사랑이야.”

은호의 집착은 이제 사랑을 넘어 숭배와 구속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한 경계가 그를 더욱 섹시하게 만들었다. 여자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을 품은 남자. 봄은 그 독을 기꺼이 마시며 그의 품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은호의 비서가 인터폰을 통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성진 그룹의 서지안 전무 측에서 보낸 변호사가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합의 제안이라며 물러서지 않고 있습니다.]

은호의 미간이 차갑게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봄을 향해 쏟아내던 다정한 열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냉혈한 대표의 모습만 남았다. 그는 봄의 흐트러진 옷무새를 직접 하나하나 정돈해주며 그녀의 이마에 깊게 키스했다.

“잠시만 기다려. 우리 시간을 방해하는 쓰레기 좀 치우고 올게.”

은호가 집무실을 나가는 순간, 그의 등 뒤로 흐르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다시 차가운 얼음처럼 변했다. 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입술은 붉게 부어올랐고, 눈동자는 욕망과 불안의 여운으로 풀려 있었다.

은호가 옆방 회의실에서 서지안의 변호사를 말로 짓밟으며 압박하는 동안, 봄은 그의 책상 서랍에서 삐져나온 의문의 서류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차 회장이 은호에게 마지막으로 던졌던 밀약서였다.

[조건: 이봄을 포기하고 해외로 보낸다면, 성진의 남은 지분 20%와 경영권 방어 지분을 무상으로 증여함.]

서류의 날짜는 어제였다. 은호는 이 제안을 거절한 것일까, 아니면 이 제안을 역이용해 아버지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일까. 사랑을 지키기 위해 비즈니스를 이용한 것인지, 비즈니스를 위해 사랑을 연출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이 봄의 심장을 차갑게 식히기 시작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은호는 완벽한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다시 봄에게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봄의 몸은 조금 굳어 있었다.

“서지안은 이제 끝났어.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멸시켰지. 이제 우리 사이를 방해할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너도 기쁘지?”

하지만 봄은 그를 살며시 밀쳐내며 책상 위의 서류를 가리켰다.

“이거 뭐예요? 은호 씨, 설마 나를 미끼로 아버님과 거래하신 거예요? 지분을 챙기려고 나를 이용한 거냐고요!”

은호의 눈동자가 아주 찰나의 순간 흔들렸지만, 이내 그는 다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봄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는 봄의 양팔을 머리 위로 고정시킨 채, 그녀의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숨결을 나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결과적으로 널 지켰고, 그 쓰레기 같은 지분도 내가 다 챙겼지.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고 비즈니스야, 봄아. 내가 말했잖아. 난 이제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괴물이라고. 하지만 잊지 마.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가장 원했던 건 지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품에 있는 너라는 걸.”

은호는 반항하는 봄의 입술을 다시 한번 거칠게, 하지만 더 애절하게 덮쳤다. 화가 난 듯하면서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키스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봄은 그의 셔츠를 손으로 꽉 움켜쥐며, 그가 정교하게 설계한 위험하고도 달콤한 늪 속으로 다시 한번 깊이 빠져들었다.

대표실의 불이 완전히 꺼지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화려한 서울의 야경 위로 흩어졌다.  차은호의 복수는 이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구속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제14화: 화려한 구속과 드러나는 진실

어둠이 짙게 깔린 대표실 내부, 공기는 여전히 두 사람의 열기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차은호는 흐트러진 셔츠 사이로 탄탄한 가슴팍을 드러낸 채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인 이봄이 앉아 있었다. 조금 전의 격정적인 순간이 남긴 여운이 그녀의 전신을 나른하게 감싸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아까 우연히 발견한 그 서류 한 장 때문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왜 그래? 아직도 그 서류 생각뿐이야? 아니면 내가 너무 몰아붙여서 화가 난 건가?"

은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며 봄의 가녀린 어깨를 자기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봄의 뒷목을 타고 내려가 척추 마디마디를 쓸어내리자, 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뜨거웠고, 그 감각은 소름 끼치도록 달콤했다.

"은호 씨는... 사랑마저 비즈니스처럼 하는 사람인가요? 나를 해외로 보내는 척하면서 아버님의 지분을 뺏어올 계획을 처음부터 세우고 있었던 거잖아요. 만약 서지안 전무가 나를 다시 납치하지 않았다면, 난 정말 당신 계획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 곁에서 쫓겨났겠죠. 그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인가요?"

봄의 서늘한 질문에 은호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는 피식, 입가에 슬픈 미소를 띄우며 위스키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얼음이 크리스탈 잔에 부딪히며 내는 맑은 소리가 정막한 방 안을 날카롭고 시리게 파고들었다.

"이봄, 넌 내가 그렇게 나쁜 놈으로 보여? 내가 아버지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아버지는 널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방법으로 널 짓밟았겠지. 난 단지 최악의 상황에서 널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칼을 쥐었을 뿐이야. 그 과정에서 네가 내 곁에 남게 된 게 나에겐 이 세상 어떤 지분보다 큰 기적이고 수익이야. 넌 내 인생에 가장 고귀한 배당금 같은 존재니까."

은호는 잔을 내려놓고 봄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자신을 보게 했다. 그의 눈동자는 욕망과 슬픔이 기묘하게 섞여 무서울 정도로 섹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내 진심은 믿어도 돼. 난 한 번 마음 준 건 절대로 놓지 않거든. 내 심장이 멈추는 한이 있어도, 넌 절대로 내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가."

은호는 다시 한번 봄의 입술을 탐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깊고, 애절함이 가득 담긴 키스였다. 봄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은호의 단단한 팔은 그녀를 보호하듯 더욱 강하게 결착시켰다. 그의 혀가 입안을 유영하며 그녀의 숨결을 앗아갈 때마다 봄의 이성은 다시금 흐릿해졌다. 비즈니스를 위해 자신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보다, 지금 당장 자신을 갈구하는 이 남자의 뜨거운 심장 박동이 더 진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은호는 봄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다정하게 넘겨주며 속삭였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집으로 보내주기 싫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너무 무서워. 오늘 같은 일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네가 다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난 미칠 것 같으니까."

은호는 대표실 안쪽에 마련된 비밀스러운 휴식 공간으로 봄을 안내했다. 그곳은 웬만한 호텔 스위트룸보다 화려했고, 은호만의 취향이 반영된 짙은 그레이 톤의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봄을 침대 위에 앉히고는 직접 무릎을 꿇고 그녀의 구두를 벗겨주었다. 재계의 에이스라 불리는 남자가 여자의 발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며 발목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지독하게 관능적이었다.

"은호 씨, 이러지 마요.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당신 체면이 있지..."

"가만히 있어. 넌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이제부터 넌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내가 주는 사랑만 받고 있으면 돼. 그게 네가 내 곁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니까. 당신을 위해 무릎 꿇는 건, 나에겐 세상 그 무엇보다 큰 영광이야."

은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는 봄의 발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 눈빛은 집착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을 뻔했던 남자의 처절한 고백이었다.

그날 밤, 은호가 잠든 사이 봄은 침대에서 몰래 빠져나와 대표실로 향했다. 은호의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마우스를 움직였다. 은호가 서지안의 변호사와 나누었던 합의서 초안이 열려 있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특약 사항: 성진 그룹의 서지안은 이봄에 대한 모든 소송과 개인적인 원한을 철회하는 대가로, 차은호가 제안한 '신규 브랜드 런칭 기획안'의 모든 권리를 양도받는다.]

그 기획안은 봄이 3년 동안 공들여 준비해온, 그녀의 커리어 결정체와도 같은 프로젝트였다. 은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경영권 방어에 꼭 필요했던 핵심 프로젝트를 서지안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어때?"

어느새 뒤에 다가온 은호의 목소리에 봄은 소스라치게 놀라 노트북을 덮었다. 은호는 샤워를 막 마친 듯 가운만 걸친 채,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구리빛 가슴 근육과 복근 위로 물방울이 타고 내려가는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섹시했다.

"이게... 이게 사실이에요? 내 프로젝트를 서지안한테 넘겼다고요? 어떻게 나한테 묻지도 않고 이럴 수가 있어요! 당신한테도, 나한테도 목숨 같은 프로젝트였잖아요!"

"그 기획안이 네 목숨보다 중요해? 서지안은 그걸 가져야만 널 포기하겠다고 했어. 난 기꺼이 거래에 응했지. 종이 쪼가리 몇 장에 네 안전을 살 수 있다면 난 내 회사 전체라도 팔 수 있어. 나한테 넌 가장 가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네가 없는 회사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야?"

은호는 성큼성큼 다가와 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눈에는 사이코 같은 광기가 아니라, 애처로운 진심이 가득했다. 그는 봄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이봄, 넌 내 전부야. 네 커리어, 네 꿈? 그건 내가 다시 만들어주면 돼.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내 모든 지위를 이용해서라도 너를 다시 업계 최고로 만들 거야. 하지만 널 잃으면 난 대안이 없어. 나한테 넌 대체 불가능한 단 하나라고. 내 심장이 뛰는 이유가 너라는 걸 왜 몰라?"

"당신은 왜 늘 이렇게 무모해요... 왜 당신 인생 전부를 걸고 나 같은 사람을 지키냐고요. 내가 뭐라고..."

봄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겼다. 은호는 그녀를 부서질 듯 꽉 안아주었다. 가운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육체와 진한 살 냄새, 그리고 위스키 향이 봄의 코끝을 찔렀다.

"무모한 게 아니야. 가장 확실한 투자를 한 거지. 내 인생을 다 바쳐서 너라는 사람을 지키는 것만큼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어. 난 비즈니스맨이야, 이봄. 절대 손해 보는 짓은 안 해."

은호는 봄의 뒷머리를 휘감아 쥐고 조심스럽게 눈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봄의 입술에 닿았다.

"원망해도 좋아. 하지만 넌 이제 안전해. 서지안도, 우리 아버지도 다시는 널 건드리지 못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넌 이제 내 품 안에서만 편안하게 숨 쉬고, 내 사랑만 먹고살면 돼. 그게 내가 네게 주는 화려한 구속이야."

은호는 봄을 안아 들고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은호는 그녀 위를 부드럽게 올라타 그녀의 두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의 팔 근육이 긴장하며 툭 불거져 나왔고,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봄의 뺨 위로 떨어졌다.

"놔줄까? 지금이라도 이 구속이 답답해서 가고 싶으면 말해. 널 보내줄 자신은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죽을힘을 다해 참아볼게."

"아니요... 안 가요. 못 가요. 당신이 이렇게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어요."

봄의 대답에 은호의 입가에 짙고 섹시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봄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뜨거운 혀가 봄의 여린 피부를 간지럽히듯 핥아 올리자, 봄의 몸에 기분 좋은 전율이 찾아왔다. 은호는 봄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손가락 끝으로 정성스럽게 풀어냈다.

"오늘 밤은 아무 생각 하지 마. 오직 내가 너한테 주는 이 열기만 기억해. 네 꿈이 잠시 멈춘 자리에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오직 나만이 네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게 허락해줘."

그의 낮고 섹시한 목소리가 주문처럼 봄의 귓가를 울렸다. 차은호의 화려한 사랑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는 가장 헌신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보호했고, 동시에 가장 뜨겁고 탐욕스러운 방식으로 그녀를 원했다.

창밖의 서울은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은호의 방 안은 두 사람의 달콤한 신음과 서로를 갈구하는 숨소리로 가득 찼다. 차은호는 더 이상 차가운 비즈니스맨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왕국을 불태울 준비가 된, 이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치명적인 섹시한 남자였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가두려는 폭군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상처를 자신의 몸으로 다 받아내고, 그 파편 위에 오직 두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는 헌신적인 남자였다. 봄은 그의 품속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안전과 거부할 수 없는 쾌락을 동시에 느꼈다.



제15화: 달콤한 위로와 새로운 시작

 

눈부신 아침 햇살이 통유리창을 넘어 은호의 비밀스러운 휴식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젯밤의 격렬했던 흔적을 증명하듯, 바닥에는 은호의 짙은 네이비색 가운과 봄의 셔츠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봄은 실크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을 피부로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몸 마디마디에 기분 좋은 뻐근함과 뜨거운 열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옆자리를 더듬었지만, 은호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하지만 시트에는 그의 진한 체취가 배어 있어 온기는 여전했다. 봄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욕실 문이 열리며 은호가 걸어 나왔다. 하얀 수건 한 장만을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였다.

그의 탄탄한 가슴팍과 선명한 복근 위로는 아직 닦이지 않은 물방울이 아침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거칠게 털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아침부터 숨이 막힐 정도로 치명적이고 섹시했다.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어젯밤에 내가 너무 괴롭혔잖아."

은호가 침대 가에 걸터앉으며 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시원한 비누 향과 남성적인 체취가 봄의 코끝을 진하게 간지럽혔다. 은호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봄의 어깨 선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훑어 내렸다.

"몇 시예요? 출근해야 하는데...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오늘은 출근 안 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늘은 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마. 어제 약속했잖아, 넌 이제 내 보호 아래 있다고. 회사에는 내가 직접 휴가 처리 지시했으니까 걱정 말고."

은호는 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맨살과 맨살이 맞닿는 뜨거운 감촉에 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은호는 그녀의 귓볼을 살짝 깨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침 되니까 또 도망갈 궁리하는 거야? 그런 태도는 나를 더 자극할 뿐인데. 이봄, 넌 정말 나를 미치게 하는 법을 알아."

은호는 봄을 다시 침대 위로 눕히고 그녀의 입술을 깊게 삼켰다. 아침의 나른함은 순식간에 다시 타오르는 열기로 변해갔다. 은호의 손길은 어젯밤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집요했으며, 그래서 더 거부하기 힘든 자극으로 다가왔다.

한 시간 뒤, 은호는 주방에서 능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평소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그였지만, 검은색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요리에 집중하는 은호의 뒷모습은 생경하면서도 가슴 설레는 광경이었다. 티셔츠 너머로 툭 불거진 그의 광활한 등 근육과 단단한 팔뚝이 움직일 때마다 봄의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대표님이 요리도 할 줄 알았네요? 정말 의외예요."

봄이 은호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으며 단단한 등 근육에 얼굴을 묻었다. 은호는 요리하던 손을 멈추고 봄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로 강하게 밀착시켰다.

"유학 시절에 독하게 배운 거야. 언젠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꼭 내 손으로 아침 차려주고 싶었거든. 근데 그게 너라서, 지금 이 순간이 내 비즈니스 성공보다 수천 배는 더 짜릿하고 만족스러워."

은호가 차려낸 식탁은 화려한 정찬은 아니었지만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며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은호의 개인 휴대폰이 쉼 없이 진동을 울려댔다. 서지안의 구속 수사 속보와 성진 그룹의 해체 위기에 대한 긴박한 보고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은호는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버리고 식탁 너머로 봄의 손을 으스러질 듯 꽉 잡았다. 그의 눈빛은 다시 차가운 포식자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봄아, 이제 진짜 전쟁의 시작이야. 서지안이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하이에나들이 나타날 거고, 아버지는 절대로 이대로 물러나지 않으시겠지. 하지만 겁내지 마. 내가 가진 모든 권력과 재력, 그리고 내 목숨까지 담보로 걸어서 널 지킬 거니까. 넌 그냥 내 옆에서 가장 화려하게 행복하기만 해."

"은호 씨... 나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지 마요. 난 당신이 당당하게 빛나는 모습이 좋아서 사랑한 거지, 나 하나 지키려고 당신의 왕국이 망가지는 걸 보려고 사랑한 게 아니에요."

봄의 진심 어린 걱정에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식탁 위에 앉히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백했다.

"나 안 망가져. 오히려 네가 내 곁에 있어서 난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예전엔 뺏기지 않으려고 수비적으로 싸웠다면, 이젠 널 지키기 위해 공격적으로 다 부술 거니까. 지는 법 같은 건 이미 잊어버렸어."

은호는 봄의 입술에 거칠고도 뜨겁게 키스했다. 식탁 위의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은호의 키스는 다정하면서도 맹목적인 소유욕이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사랑해, 이봄. 세상 그 누구보다 섹시하고 유능한, 오직 나만의 여자."

오후가 되자 은호는 봄을 데리고 도심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개인 별장으로 향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시선에서 벗어나 오직 두 사람만의 농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은호는 거추장스러운 수트를 벗어 던지고 봄을 데리고 야외 수영장으로 향했다.

푸른 물결 위로 부서지는 강렬한 햇살 아래, 은호는 상의를 탈의한 채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 밖으로 솟아오르는 그의 근육질 몸매는 태양 아래 빛나는 조각상 같았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물속에서 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들어와. 햇볕 때문에 물 온도가 딱 좋아. 네 몸을 녹여줄 만큼."

봄이 수줍게 수영복 차림으로 물가에 서자, 은호의 눈빛은 순식간에 짐승처럼 짙어졌다. 그는 물속에서 걸어 나와 봄의 허리를 낚아채고 그대로 물속으로 함께 빠졌다. 차가운 물의 감촉과 두 사람의 뜨거운 체온이 맞닿아 기묘한 반응을 일으켰다.

물속에서 나누는 키스는 몽환적이고도 강렬했다. 은호는 봄을 자신의 몸에 빈틈없이 밀착시킨 채, 그녀의 젖은 수영복 너머로 느껴지는 곡선을 따라 손길을 거침없이 옮겼다. 물의 저항과 부력 덕분에 두 사람의 접촉은 더 농밀하고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은호 씨... 하아, 누가 보면 어떡해요...!"

"아무도 없어. 오직 너랑 나, 그리고 이 하늘뿐이야. 설령 누가 본다고 해도 상관없어. 넌 내 여자라는 걸 세상 모두가 알아야 하니까."

은호는 봄의 수영복 끈을 부드럽게 풀어내리며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와 목덜미에 깊은 입맞춤을 새겼다. 그의 대담한 행동에 봄은 당황하면서도 그의 압도적인 리드에 몸을 맡겼다. 은호는 그녀를 수영장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이고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했다.

가장 원초적이고도 순수한 욕망이 푸른 물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은호는 그녀의 귓가에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넌 영원히 내 구속 안에 있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감미롭고 위험하게 섹시했다.

행복한 시간이 흐르고 저녁이 찾아왔을 때, 별장 정문에 낯선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은호의 어머니, 신 여사였다. 그녀는 차 회장과 이혼 후 세간의 눈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었지만, 이번 성진 그룹 사태와 아들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고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은호야, 네가 정말 미친 짓을 했더구나. 서지안을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감히 성진의 심장까지 건드리다니. 네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신 여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은호 옆에 선 봄에게 향했다. 봄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미리 연락도 없이."

"네 아버지가 이미 전문 킬러 같은 변호사들과 사람들을 풀었다. 이번엔 단순히 경영권 문제가 아니야. 네가 가진 모든 지분을 동결시키고 이 여자를 아예 업계에서 매장해버리겠다고 하더구나. 은호야, 지금이라도 멈춰라. 이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전쟁이 아니야. 자칫하면 네 목숨도 위험해."

어머니의 절박한 경고에도 은호의 얼굴은 오히려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는 봄의 떨리는 손을 더욱 꽉 거머쥐며 어머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은 이제 한 집안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과 여자를 지키려는 군주의 것이었다.

"어머니, 전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어요. 아버지가 이 사람을 매장하겠다면, 전 아버지의 왕국을 통째로 무덤으로 만들어 그 안에 아버지를 묻어버릴 겁니다. 제가 지킬 건 아버지의 낡은 유산이 아니라, 바로 지금 제 손을 잡고 있는 이봄이라는 여자뿐이에요."

은호의 단호하고 서늘한 말에 신 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함께,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세계를 걸어버린 남자의 용기에 대한 묘한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신 여사가 떠난 뒤, 은호는 불안함에 떨고 있는 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걱정 마. 내가 말했지? 넌 내 화려한 구속 안에서 가장 안전할 거라고. 이제 내가 똑똑히 보여줄게. 사랑에 미친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지."

은호는 봄을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강하고 흔들림 없이 고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봄에게 있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하고 견고한 요새였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는 별장의 테라스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의 체온을 탐닉하며 확인했다.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폭풍우를 예감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달콤한 위로를 놓치고 싶지 않은 연인들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차은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옷을 부드럽게 벗겨내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오늘 밤은 잠들지 못하게 해줄게. 네 온몸의 세포가 내 이름과 내 손길만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섹시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낮게 깔리며, 두 사람의 새로운 전쟁이자 로맨스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제16화: 위험한 동맹과 반격의 서막

별장의 아침은 고요했지만, 그 정적 아래에는 거대한 폭풍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차은호는 새벽같이 일어나 테라스에서 누군가와 긴밀한 통화를 마친 뒤였다. 간밤의 격정적인 사랑의 흔적이 남은 침대 위에서, 이봄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은호는 조용히 다가가 잠든 그녀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제 어머니가 남긴 경고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서늘할 정도로 맑았다.

"걱정 마, 봄아. 네가 깨어났을 땐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해져 있을 테니까."

은호는 침대 옆 의자에 걸쳐둔 셔츠를 집어 들었다. 거울 앞에 선 그는 단추를 하나씩 채우며 자신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사랑을 위해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남자의 눈은 이제 슬픔 대신 차가운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빳빳하게 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조여 맸다. 완벽하게 무장한 그의 수트 핏은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과 섹시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서울 도심의 한 은밀한 와인 바. 낮에는 운영하지 않는 이곳에 은호가 나타났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성진 그룹의 서 회장, 즉 서지안의 아버지였다. 자신의 딸을 감옥에 보낸 원수와 마주 앉은 은호의 태도는 여유롭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했다.

"서 회장님, 딸자식을 감옥에 보낸 놈을 보러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은호는 차가운 와인을 잔에 따르며 먼저 말을 건넸다. 서 회장의 얼굴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차은호... 네놈이 감히 어쩌자고 나를 불러내? 내 딸 지안이를 저 꼴로 만들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지안이가 저렇게 된 건 제가 아니라 제 아버님, 차승만 회장 때문이라는 걸 더 잘 아실 텐데요? 아버지는 지안이를 도구로 쓰다가 효용 가치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내치셨죠. 지안이가 구속될 때, 저희 아버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시던가요?"

은호의 날카로운 지적에 서 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체를 숙여 서 회장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의 수트에서 풍기는 진한 우디 향과 서늘한 카리스마가 공간을 압도했다.

"저는 제 아버지를 끌어내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성진 그룹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워드릴 수도 있죠. 조건은 하나입니다. 서 회장님이 가진 차 회장의 비자금 장부 원본, 그걸 저에게 넘기세요. 그럼 지안이는 집행유예로 나올 수 있게 제가 손을 써두겠습니다."

"네 아버지를 팔아서 딸을 구하라는 말이냐?"

"아니요, 아버지를 버리고 '실익'을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끝났거든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비정한 비즈니스의 세계, 그 정점에 선 은호의 모습은 잔인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결국 서 회장은 은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별장으로 돌아온 은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던 봄을 발견했다. 봄은 은호가 들어오자마자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은호 씨! 어디 갔다 온 거예요? 연락도 안 되고... 정말 무서웠단 말이에요."

은호는 수트 상의를 벗어 던지고 봄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는 봄을 가슴에 꽉 채운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밖에서 풍기던 차가운 비즈니스의 향기는 사라지고, 오직 봄을 향한 뜨거운 갈증만이 남았다.

"미안해. 널 지킬 방패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드느라 늦었어. 이제 다 됐어, 봄아."

은호는 봄을 거실 소파 위에 눕히고 그 위를 덮쳤다. 낮에 서 회장을 압박하던 냉혈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욕망에 충실한 남자만이 존재했다. 은호는 봄의 얇은 가디건 단추를 입술로 하나씩 밀어내며 그녀의 하얀 살결 위에 자신의 낙인을 찍듯 입을 맞췄다.

"은호 씨, 아까... 누구 만난 거예요? 어머니 말씀이 계속 걸려서..."

"생각하지 마. 지금은 내 손길, 내 숨소리에만 집중해. 네가 다른 걱정 하는 거, 나 참기 힘들거든."

은호의 손이 봄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올라가자 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은호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가르랑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오늘 정말 힘들었어. 널 지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비열해졌는지 넌 모를 거야. 그러니까... 네가 위로해줘.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건 너뿐이니까."

그의 절박한 고백은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했다. 봄은 은호의 넓은 어깨를 꽉 껴안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소파 위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고, 석양이 지는 별장 안은 다시 한번 뜨거운 신음과 열기로 가득 찼다.

은호는 봄의 몸 구석구석을 탐닉하며 그녀가 자신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의 움직임은 거칠면서도 지독하게 섬세했다. 그는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을 핥아 올리며,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결합을 확인했다.

행복한 정사가 끝난 뒤, 은호는 봄을 품에 안은 채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서 회장에게서 방금 전달받은 디지털 파일이 든 USB가 쥐어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봄이 묻자, 은호는 USB를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 아버지를 무너뜨릴 스모킹 건. 그리고 너와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열쇠야."

하지만 그 순간, 별장의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그리고 정막을 깨는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거실 대형 스크린이 자동으로 켜졌다. 화면 속에는 차승만 회장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은호야, 네가 서지안의 아비와 손을 잡을 것까지는 예상 못 했구나. 대단하다. 정말 내 아들답게 영리하고 비열해졌어."

"아버지... 어떻게 여길!"

"내가 준 돈으로 산 별장이다. 여기 모든 보안 시스템의 마스터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잊었느냐? 그리고 이봄 팀장, 자네에게도 보여줄 게 있네."

화면이 바뀌더니, 봄이 예전에 근무했던 전 직장 상사와 나누었던 은밀한 대화 녹취록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봄이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직하기 위해 정보를 팔아넘겼다는 식의 정교하게 조작된 증거였다.

"은호 씨! 저거 거짓말이에요! 난 저런 적 없어요!"

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지만, 차 회장의 목소리는 잔인하게 이어졌다.

"은호야, 네가 지키려는 여자가 이런 수준이다. 너를 이용해 우리 가문의 정보를 빼돌리려던 스파이지. 자, 이제 선택해라. 그 USB를 나에게 넘기고 이 여자를 내 손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너와 이 여자 둘 다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 10분 주마."

스크린이 꺼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은호는 어둠 속에서 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을 부서질 듯 꽉 쥐었다.

"은호 씨... 나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봄이 흐느끼며 말하자, 은호는 그녀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뛰고 있었다.

"알아. 저런 싸구려 조작에 속을 만큼 난 바보가 아니야. 아버지가 실수하셨네. 나를 화나게 하는 건 참아도, 널 모욕하는 건 내가 참지 못한다는 걸 깜빡하셨어."

은호는 어둠 속에서도 정확하게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다이얼을 눌렀다.

"팀장님, 플랜 B 시작하세요. 아버지가 먼저 문을 열어주셨네요. 지금 당장 성진 그룹 지분 매입 공시 띄우고, 검찰에 장부 넘기세요. 예, 제가 책임집니다."

은호는 전화를 끊고 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봄아, 이제 진짜 전쟁이야. 우리 아버지는 오늘 밤, 자신이 일궈온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대가로 넌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여자가 될 거고."

은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봄의 입술에 짧고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것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남자의 맹세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아버지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광기 어린 헌신 속에 갇힌 여자. 두 사람의 운명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국과 승리의 갈림길에 섰다. 차은호는 봄의 손을 잡고 어둠이 깔린 별장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소름 끼치도록 섹시했다.



제17화: 왕국의 몰락과 마지막 선택

 

차 회장의 서늘한 경고가 남긴 잔상이 공중으로 흩어지기도 전, 별장의 전원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밝아진 조명 아래서 이봄은 온몸을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스크린에 띄워진 조작된 증거들이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3년 전, 그저 열심히 살고 싶어 이직을 준비했던 평범한 선택이 차 회장의 손을 거쳐 추악한 '산업 스파이'의 증거로 둔갑해 있었다.

"은호 씨... 정말 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당신을... 당신 정보를 팔아요... 그건 다 조작된 거예요."

흐느끼는 봄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거실을 울렸다. 절망에 빠진 그녀의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때, 은호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차가운 비즈니스맨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얼굴이었다. 은호는 떨리는 봄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뜨거운 뺨에 갖다 댔다. 그의 뺨에서 느껴지는 거친 수염의 감촉과 뜨거운 체온이 봄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알아. 네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 그러니까 울지 마. 네가 울면, 난 저 노인을 내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은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봄을 향한 지독한 헌신이 서려 있었다. 그는 봄을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완벽하게 피팅된 수트 상의가 구겨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은호는 봄의 젖은 눈가를 혀로 살짝 핥아 올리며 그녀의 시선을 강제로 고정시켰다. 그의 눈동자에는 광기 어린 소유욕과 깊은 애정이 뒤섞여 기묘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봄, 나 봐. 아버지가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던진 그 싸구려 미끼에 흔들리지 마. 넌 그냥 내 여자야. 네가 스파이든, 사기꾼이든, 혹은 살인자라고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난 이미 너한테 중독됐고, 너 없이는 이 왕국도, 내 목숨도 아무 의미 없으니까. 내 가치를 결정하는 건 저 서류가 아니라 바로 너야."

은호의 거침없는 고백은 그 어떤 로맨틱한 시보다 섹시하고 파괴적이었다. 그는 봄의 셔츠 깃을 거칠게 젖히며 그녀의 하얀 어깨에 깊게 입을 맞췄다. 아버지가 보고 있는 모니터 따위는 이제 그에게 장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보란 듯이, 세상에 선포하듯이 봄을 탐닉했다.

은호는 봄을 안아 들고 별장 2층의 침실로 향했다. 거실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오직 두 사람만의 정적이 감도는 공간. 은호는 침대 위로 봄을 조심스럽게 눕힌 뒤, 자신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바닥에 던졌다. 셔츠 단추를 서너 개쯤 풀어헤치자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의 탄탄한 흉근과 툭 불거진 쇄골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지독하게 위험하고도 아름다웠다.

"은호 씨...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회장님이 지분을 동결하고 당신을 무너뜨리겠다고..."

"조용히 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밖의 소음 따위 잊어. 오직 내 이름만 불러, 봄아."

은호는 봄의 말을 거친 입술로 막아버렸다. 갈증 난 짐승처럼 그녀를 집어삼키는 그의 키스는 지독하게 진하고 뜨거웠다. 은호의 커다란 손이 봄의 허리 라인을 타고 올라와 가슴팍을 강하게 압박했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손바닥 감촉에 봄의 사고 회로가 정지됐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힘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듯 강렬했다.

은호는 봄의 귓가를 잘게 씹으며 낮게 읊조렸다.

"세상이 우리를 비난해도 좋아. 아버지가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어 길거리에 나앉게 해도 상관없어. 난 지금 네 몸 안의 온기가 가장 절실해. 나를 살게 해줘, 봄아. 네가 아니면 난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의 절박한 고백은 그 어떤 유혹보다 강렬한 최음제가 되어 봄을 적셨다. 은호는 봄의 정장 스커트 지퍼를 단숨에 내려버렸다.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은호의 움직임은 평소의 젠틀함을 완전히 잊은 듯 야성적이고 탐욕스러웠다. 그는 봄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감게 하고는, 그녀의 피부 구석구석을 자신의 낙인으로 물들여 나갔다.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절박했고, 그 절박함은 두 사람을 평소보다 더 깊고 어두운 쾌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봄은 은호의 젖은 등을 손톱으로 긁으며 신음했다.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의 불안이 짜릿한 환희로 바뀌었다. 이 남자가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세계를 버렸다는 사실이, 그 치명적이고도 섹시한 희생이 그녀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은호는 그녀의 눈동자에 오직 자신만이 가득 차기를 바라는 듯, 쉴 틈 없이 그녀를 몰아붙이며 사랑을 갈구했다.

격정적인 시간이 지나고, 은호는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봄의 가슴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은 어느덧 캄캄한 밤이었고, 오직 두 사람의 체온만이 이 방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은호는 봄의 부드러운 살결 위로 자신의 입술을 비비며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은호 씨, 아까 전화한 거... 정말 괜찮은 거예요? 아버님을 검찰에 넘기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차 회장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은호는 몸을 일으켜 봄을 품에 껴안았다. 그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짐승처럼 그녀를 탐닉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정한, 그러나 결연한 눈빛이었다.

"괜찮아. 내가 가진 명예나 지위를 다 잃어도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난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에이스 커뮤니케이션? 그 화려한 껍데기 없어도 돼. 내가 가진 최고의 자산은 바로 너니까. 너라는 존재 자체가 내 왕국이야."

은호는 침대 옆 협탁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빛이 반짝이며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과 땀에 젖은 어깨선을 비췄다. 그 모습은 흡사 몰락해가는 제국의 황제처럼 장엄하고 섹시했다.

"아버지는 내가 지분을 지키려고 네 손을 놓을 줄 아셨겠지. 하지만 틀렸어. 난 지분을 버리고 널 선택했어. 그리고 그게 아버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나의 마지막 복수가 될 거야. 평생 권력만 탐하느라 사랑 한 번 못 해본 노인네에게, 사랑 때문에 왕국을 불태우는 아들을 보여주는 거. 그게 아버지가 받을 가장 큰 형벌이지."

은호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조차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봄아, 이제 우리 여행 가자. 모든 게 정리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하루 종일 침대에서 너랑만 있을 거야. 먹고, 자고, 사랑하고... 그동안 아버님 눈치 보느라, 회사 일 하느라 못 했던 거 원 없이 하게 해줄게. 네 몸에 내 흔적이 마를 날이 없게 말이야."

다음 날 아침, 은호의 예언대로 세상은 뒤집어졌다. 차승만 회장의 비자금 장부와 성진 그룹과의 추악한 유착 관계가 전 언론에 폭로됐다. 차 회장은 긴급 체포됐고,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주가는 폭락했다. 하지만 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개인 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선언과 함께 대표직 사퇴서를 던진 상태였다.

기자들이 깔린 본사 건물을 유유히 빠져나와, 은호는 봄과 함께 작은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갑갑한 수트 대신 편안한 리넨 셔츠를 입은 그는 훨씬 더 자유로워 보였고, 거친 남성미가 더해져 여전히 눈부시게 섹시했다.

"진짜 다 버린 거예요? 후회 안 해요?"

봄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묻자, 은호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입가에 비스듬히 미소를 띄웠다.

"응. 이제 난 그냥 차은호야. 가진 건 없지만 몸은 아주 튼튼한 네 남자. 후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데 왜 후회를 해."

은호는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봄의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걱정 마. 내가 개인적으로 숨겨둔 비자금은 꽤 되니까, 네 평생 명품 사주고 맛있는 거 먹이는 건 문제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은호는 차를 한적한 갓길에 세우더니 봄의 고개를 돌려 숨이 막힐 듯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혀가 봄의 입안을 헤집으며 다시 한번 소유권을 주장했다.

"밤마다 널 미치게 해줄 내 체력은 여전히 에이스급이거든. 기대해, 오늘 밤부터는 정말 잠들 시간도 안 줄 테니까."

그의 농담 섞인 치명적인 유혹에 봄은 결국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비로소 두 사람을 짓누르던 무거운 왕관과 의심이 사라지고, 오직 서로를 향한 갈증만이 남은 진정한 연인이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뒤를 쫓는 검은 차량 한 대가 백미러에 비쳤다. 차 회장의 마지막 반격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적의 등장일까. 은호는 백미러를 보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새로운 사냥을 앞둔 맹수의 흥분이 서려 있었다.

"이봄, 안전벨트 꽉 매. 이제부터 진짜 익사이팅하고 섹시한 신혼여행이 시작될 테니까."

은호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과 강렬한 눈빛이 서울의 야경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18화: 도망자들의 낙원과 뜨거운 추격

서울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백미러 너머로 서서히 멀어졌다. 차은호는 한 손으로 가볍게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봄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은 채 국도를 달렸다. 수억 원대를 호가하던 의전 차량 대신 선택한 투박한 지프차였지만, 운전석에 앉은 은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치명적이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여 드러난 그의 단단한 팔뚝 위로 굵은 혈관이 툭 불거져 있었고, 살짝 풀어진 단추 사이로 비치는 쇄골 라인은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다.

“은호 씨,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예요? 사람들이, 특히 검찰이랑 기자들이 다 당신만 찾고 있을 텐데.”

봄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은호는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등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자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전부 다 버린 게 아니라, 너라는 제일 소중한 걸 챙겨서 나온 거야. 나머진 찌꺼기일 뿐이지. 이제 내 세상은 이 차 안, 그리고 네가 서 있는 곳이 전부야. 명예니 직함이니 하는 것들은 너랑 나누는 키스 한 번보다 가치 없어.”

은호의 낮은 저음이 차 안의 밀폐된 공기를 타고 봄의 가슴에 진동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차를 해안가 절벽 끝에 자리 잡은 작은 별장 앞에 세웠다. 이곳은 차 회장도 모르는, 은호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은밀한 안식처로 준비해둔 곳이었다.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은호는 기다렸다는 듯 봄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정막을 깨는 순간, 그의 거친 입술이 봄의 입술 위로 덮쳐왔다. 서울에서의 긴장감과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내려는 듯, 그의 키스는 지독하게 탐욕스럽고 집요했다. 은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녀의 숨결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하아... 은호 씨... 잠깐만요...”

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리넨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은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몸에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과 뜨거운 심장 박동에 봄의 몸이 녹아내릴 듯 떨렸다. 은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짐승 같은 소유욕을 드러내며 속삭였다.

“아무도 우릴 방해할 수 없어. 이제 핸드폰도, 비서도, 아버지도 없어. 오직 나랑 너뿐이야. 내가 널 얼마나 원해왔는지,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나를 미치게 하는지 오늘 밤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게. 각오해, 이봄.”

은호는 봄을 번쩍 들어 올려 침실로 향했다.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밤이었다. 그는 봄을 침대 위에 눕히고는 천천히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달빛을 받아 구리빛으로 빛나는 그의 넓은 어깨와 선명한 복근은 마치 신이 빚어놓은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은호는 그녀 위로 올라타 두 손을 결박하듯 잡고는, 그녀의 목덜미를 따라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이봄, 넌 내 구원이야. 그래서 널 절대 놓아줄 수가 없어. 네가 내 옆에서 안전하게 숨 쉬고, 내 이름만 부르는 거... 그게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니까.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난 네 손잡고 갈 거야.”

그는 봄의 여린 피부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듯 깊게 입을 맞추고 자국을 남겼다. 통증과 쾌락이 뒤섞인 자극에 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은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그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탐닉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린 대가가 얼마나 달콤하고 치명적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두 사람의 신음이 파도 소리에 섞여 밤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격정적인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창밖의 검은 바다를 보며 나란히 누웠다. 은호는 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자신의 품 깊숙이 끌어당겼다. 땀에 젖은 두 사람의 살결이 맞닿아 끈적하고도 기분 좋은 열기를 만들어냈다.

“봄아, 나 사실 조금 무서웠어.”

평소 빈틈없던 대표님이 내뱉은 의외의 나약한 고백에 봄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은호는 어두운 천장을 응시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눈가에 맺힌 피로와 애정이 달빛 아래서 묘하게 섹시하게 보였다.

“아버지가 널 해칠까 봐. 내가 가진 돈과 권력이 널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오히려 널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걸 보면서 내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거든. 사랑하는 여자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대표가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고. 그래서 다 던져버린 거야. 이제 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남자지만, 대신 널 온전히 내 팔로 안을 수 있게 됐어. 그거면 충분해.”

“은호 씨는 가난한 남자가 아니에요. 나한테는 이 세상 누구보다 크고 강한 사람인걸요.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에요.”

봄이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은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며 다시 한번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다시 봄의 허리 라인을 타고 부드럽게 내려가며 그녀를 다시금 자극했다.

“나 아직 배고파, 봄아. 저녁 요리 말고..너한테. 밤새도록 너만 먹고 싶어.”

은호의 능글맞으면서도 지독하게 섹시한 농담에 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은호는 그녀를 다시 한번 자신의 아래에 가두며 낮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지독하게 감미로웠고, 두 사람의 밤은 바다보다 더 깊고 푸르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행복한 정적을 깨고, 별장 밖에서 낯선 타이어 마찰 소리와 거친 엔진음이 들려왔다. 은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고 날카로운 맹수의 것으로 변했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태블릿 PC를 켰다. 별장 외곽에 설치된 열화상 CCTV 화면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별장을 은밀히 포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차 회장님이 보낸 사람들이에요? 벌써 여기까지 찾아낸 거예요?”

봄이 사색이 되어 묻자, 은호는 침착하게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집어 입으며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탄탄한 몸은 다시금 전투를 앞둔 전사의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아니, 아버지는 지금 검찰 조사실에서 나오지도 못해. 이건 서지안의 잔당들이거나, 내가 성진을 무너뜨릴 때 이용했던 경쟁업체 놈들이겠지. 내가 대표직을 내려놓고 빈털터리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거야. 주인이 없는 고기라고 생각하나 본데, 틀렸어.”

은호는 벽면에 숨겨진 비밀 수납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호신용 권총 한 자루와 현금 뭉치, 그리고 위조 여권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권총의 탄창을 능숙하게 확인하며 봄에게 장난스럽게 윙크를 건넸다. 그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그는 지독하게 섹시했다.

“걱정 마. 내가 말했지? 내가 숨겨둔 비자금은 네 상상보다 훨씬 많다고. 그리고 난 당하고만 있는 성격도 아니야. 나 차은호야.”

은호는 봄의 손을 잡고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로 향했다. 뒤에서 현관문이 부서지는 굉음이 들려왔지만, 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지하에 숨겨두었던 검은색 튜닝 스포츠카의 시동을 걸었다. 굉음과 함께 엔진이 포효하며 별장 전체를 울렸다.

“이봄, 이제부터 진짜 스릴 넘치고 섹시한 도주극 시작이야. 무서우면 내 어깨 꽉 잡아. 절대 안 놓을 테니까.”

차는 별장의 뒷문을 박차고 광란의 질주를 시작했다. 뒤따라오는 추격 차량 세 대. 은호는 핸들을 거칠게 꺾으며 속도를 높였다. 해안 절벽 도로를 질주하는 그의 날카로운 옆얼굴은 차가운 조명 아래서 푸르게 빛났다. 위기 속에서 오히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듯, 그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쫓아오는 놈들, 하나씩 정리해줄게. 감히 내 여자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 똑똑히 보여주지. 넌 그냥 내 운전 솜씨나 감상해.”

은호는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무전기를 켰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냉철한 지휘관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팀장님, 좌표 전송했습니다. 지금 당장 에이전트들 가동하세요. 쓰레기 청소 시간입니다. 한 놈도 놓치지 마세요.”

은호는 단순히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추격자들을 자신이 미리 파놓은 함정으로 유인하고 있었다. 차은호는 대표직을 내려놓았을지 몰라도, 그가 전 세계를 무대로 구축해놓은 개인 보안팀과 정보망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는 질주하는 차 안에서 겁에 질린 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사랑해. 이 짧은 전쟁이 끝나면, 진짜 평화로운 침대 위에서 널 다시 가질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견뎌줘. 넌 내 옆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우니까.”

그의 뜨거운 선언과 함께 스포츠카는 어둠을 뚫고 벼랑 끝 도로를 날아오르듯 질주했다. '섹시한 대표님' 차은호의 진짜 반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그는 다시 한번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고 위험한 사냥꾼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19화: 벼랑 끝의 유혹과 최후의 심판

 

해안 절벽을 따라 굽이치는 도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오직 차은호가 모는 스포츠카의 날카로운 헤드라이트만이 파도 소리가 몰아치는 절벽 위를 위태롭게 비추고 있었다. 뒤를 쫓는 세 대의 검은 세단은 거리를 좁히며 위협적으로 전조등을 번쩍였다. 엔진의 굉음이 고요한 밤바다를 찢어발기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은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셔츠 너머로 툭 불거진 그의 어깨 근육이 기어 레버를 거칠게 조작할 때마다 요동쳤다. 옆좌석에서 하얗게 질린 채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이봄을 곁눈질한 은호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차가운 손을 덮어 눌렀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가 봄의 떨림을 잠시 멎게 했다.

"봄아, 나 봐. 무서워하지 마. 이 차, 방탄에 특수 튜닝까지 마친 거야. 저딴 하이에나들이 짖어댄다고 무너질 만큼 허술하게 만들지 않았어. 널 태운 차잖아."

그의 목소리는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여유로운 저음이 오히려 봄에게는 기이한 안도감과 함께 소름 끼치는 흥분을 선사했다. 은호는 가속 페달을 더욱 깊게 밟았다. 차체가 뒤로 밀리는 엄청난 가속도와 함께 은호의 입가에 서늘하고도 섹시한 미소가 걸렸다.

"저놈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내가 대표직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내 이빨까지 뽑힌 줄 안다는 거. 오늘 확실히 가르쳐줘야겠네. 주인을 무는 개가 어떤 최후를 맞는지. 감히 내 휴식을 방해한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말이야."

추격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뒤따라오던 차량 중 한 대가 무리하게 차선을 변경하며 은호의 차 측면을 들이받았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봄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지만, 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운터 스티어를 먹여 차체를 바로잡았다. 그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굳건했고, 핸들을 쥐고 조절하는 팔뚝의 근육은 터질 듯 팽팽해져 있었다.

"이봄, 눈 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저놈들을 사냥하러 가는 거니까 똑똑히 봐. 내 옆에 있는 네가 얼마나 안전한지."

은호는 터널 입구를 앞두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180도 회전시켰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자욱한 연기 속에서 은호의 차는 이제 추격자들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는 기어를 후진으로 넣더니 좁은 터널 안을 광속으로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질주하는 차 안에서 은호는 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봄의 얼굴에 닿았다.

"무서워? 그럼 지금 나한테 키스해. 내 숨결이 네 공포를 다 집어삼키게. 네 머릿속에 오직 나밖에 남지 않도록."

미친 짓이었다. 시속 150km가 넘는 속도로 터널을 역주행하며 키스를 요구하는 남자라니. 하지만 은호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입술이 거칠게 맞물렸다. 뒤섞인 숨결 속에서 비릿한 아드레날린의 향취가 났다. 죽음의 공포가 가장 농밀한 성적 쾌락으로 치환되는 찰나였다. 은호는 핸들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봄의 뒷머리를 휘감아 쥐며 그녀를 깊게 탐닉했다. 혀가 얽힐 때마다 차의 엔진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들려왔다.

뒤쫓던 차량들이 당황하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터널 안에 날카롭게 메아리쳤다. 은호는 키스를 멈추지 않은 채 한 손으로 무전기를 눌렀다. 그의 목소리는 키스 직후의 열기로 인해 평소보다 더 낮고 섹시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이다. 터널 입구 차단해. 쥐 한 마리도 못 나가게."

동시에 터널 양 끝에서 은호가 미리 배치해둔 대형 트럭들이 길을 막아섰다. 추격자들은 완벽한 쥐덫에 갇힌 꼴이 되었다. 은호는 그제야 입술을 떼고 차를 멈춰 세웠다. 그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어헤치며 차에서 내렸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터널 안, 주황색 비상등만이 그의 조각 같은 상체 위를 번뜩이며 비추고 있었다.

은호는 차 안에서 떨고 있는 봄에게 "잠깐만 기다려, 금방 끝낼게"라고 다정하게 속삭인 뒤, 추격 차량들을 향해 걸어갔다. 차에서 내린 사내들은 은호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질려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은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가볍게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누가 보냈지? 서지안의 잔당인가, 아니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우리 아버지가 보낸 사냥개인가? 대답에 따라 너희가 여기서 걸어 나갈지, 실려 나갈지가 결정될 거야."

"차은호... 대표직도 없는 놈이 기세는 여전하군!"

사내 중 한 명이 달려들었지만, 은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총신으로 그의 급소를 타격한 뒤 발로 차서 바닥에 굴렸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빠르고 잔혹할 정도로 우아했다. 은호는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가슴을 구두 끝으로 짓누르며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평소의 젠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굶주린 맹수의 광기만이 서려 있었다.

"내 여자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대가는 너희 목숨으로도 부족해.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순순히 불어. 누가 보냈어."

결국 사내는 은호의 서늘한 기세에 눌려 자백했다. 은호의 예상대로 서지안이 수감되기 전 고용한 해외 용병들이었다. 은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총을 거두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오늘은 내 여자 앞에서 거칠게 행동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보안팀이 올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무릎 꿇고 기다려. 한 명이라도 움직이면 그땐 진짜 자비란 없을 테니까."

은호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의 셔츠에는 사내와 대치하며 묻은 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이 지독하게 관능적이었다. 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봄을 강하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은호의 단단한 가슴팍이 봄의 뺨에 닿았다.

"미안해. 이런 험한 상황 겪게 해서. 많이 놀랐지?"

"은호 씨...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봄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은호는 그녀의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입술 감촉에 봄의 긴장이 비로소 녹아내렸다.

터널을 빠져나온 차는 해안가 벼랑 끝에 위치한 낡고 거대한 등대 앞에 멈췄다. 은호는 차 문을 열고 봄을 공주님 안기 하듯 번쩍 안아 들었다. 등대 위로 올라가자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차가운 밤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은호는 등대의 작은 난간에 봄을 세워두고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단단한 흉근이 봄의 등에 밀착되었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귀밑을 간지럽혔다.

"여기가 내 최후의 보루야. 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만을 위한 안식처."

은호는 봄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을 보게 돌렸다. 그는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고 있던 셔츠를 아예 벗어 던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완벽한 피지컬—넓은 어깨, 단단하게 갈라진 가슴 근육, 그리고 치명적인 치골 라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봄을 압도했다. 은호는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왼쪽 가슴, 심장이 뛰는 곳에 올렸다.

"느껴져? 네가 내 옆에 있을 때만 내 심장이 이렇게 미친 듯이 뛰어. 난 이제 경영인도, 대표도 아니야. 지위도 명예도 다 버린, 그냥 너한테 미친 한 남자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제 네가 날 책임져야 해. 평생 네 곁에서만 숨 쉴 수 있게."

은호는 봄을 등대 벽으로 밀어붙이고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까의 급박함 대신, 지독할 정도로 느리고 깊은 유혹이었다. 그의 손이 봄의 원피스 지퍼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 나갔다. 벼랑 끝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도 두 사람 사이의 타오르는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은호는 그녀의 쇄골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오늘 밤은 잠들 생각 하지 마. 네 몸 구석구석에 내 이름을 새길 거니까. 네가 꿈속에서도 내 숨결만 찾고, 내 손길 없이는 잠들 수 없게 만들 거야."

등대의 불빛이 주기적으로 두 사람을 비추었다 사라졌다. 빛이 비칠 때마다 은호의 다부진 근육질 몸매와 봄의 유려한 곡선이 겹쳐지며 한 폭의 명화 같은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은호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뜨거운 방식으로 그녀를 위로했고, 봄은 그의 화려하고도 섹시한 구속 속에서 비로소 완전한 안식을 느꼈다.

왕국은 몰락했고 왕관은 던져졌지만, 차은호는 이 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자가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남자의 섹시함은 그 어떤 권력보다 눈부시고 위험했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져가는 밤, 벼랑 끝의 유혹은 가장 달콤하고 치명적인 심판이 되어 그들을 적셨다. 은호는 그녀의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사랑해, 내 마지막 여왕님."



제20화: 완벽한 낙원과 다시 시작되는 전설 (최종화)

등대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거칠게 몰아치던 파도 소리도 이제는 두 사람의 평온한 숨소리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잔잔한 숨을 고르며 잦아들었다. 등대 꼭대기 층에 마련된 은밀한 침실, 차은호는 옅은 잠에 든 이봄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간밤의 격정적인 흔적이 남은 실크 시트 위로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와 쇄골 라인이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호는 그녀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하지만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소유욕 가득한 손길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어제의 추격전과 터널에서의 사투는 이제 아주 먼 과거의 꿈처럼 느껴졌다. 차은호는 이제 성진 그룹의 유력한 후계자도, 에이스 커뮤니케이션의 오만한 대표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벽한 승리감을 맛보고 있었다. 세상이 강제로 씌워준 무거운 왕관을 스스로 내던지고 얻어낸 이 여자의 사랑이야말로, 그가 평생 차가운 비즈니스 세계에서 갈구해온 유일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은호는 그녀의 정수리에 코끝을 묻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살결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박혔다.

몇 시간 뒤, 해가 완전히 떠올라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자 은호는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상의를 걸치지 않은 채 편안한 면바지 하나만 걸친 그의 등 근육은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완벽한 V라인과 움직일 때마다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근육들은 지독하게 야성적이고 섹시했다. 잠에서 깬 봄이 까치발을 들고 뒤에서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단단한 허리를 껴안았다.

"벌써 일어났어요? 몸도 피곤할 텐데 좀 더 자지..."

봄의 목소리는 어젯밤의 격렬했던 열기 때문에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은호는 뒤로 돌아 봄을 가볍게 들어 올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며 뜨거운 커피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입맞춤을 건넸다.

"잠들기 아까웠어. 눈 뜨면 네가 내 옆에 있는 이 현실이 사라질까 봐. 이제 정말 세상에 우리만 남았네, 봄아. 누구의 방해도, 누구의 시선도 없는 우리만의 세상."

은호는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봄의 가운 끈을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빛은 아침의 평화로움 속에서도 다시금 짙은 욕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 어제 터널에서 약속했지. 이 전쟁 끝나면 침대 위에서 널 다시 가질 거라고. 아직 내 약속 안 끝났어. 오늘 하루 종일 널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고 탐닉할 생각인데, 어때? 감당할 수 있겠어? 내 체력,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은호의 능글맞으면서도 치명적인 물음에 봄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넓은 어깨를 꽉 껴안았다. 두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작은 별장을 가득 채웠다. 이제 더 이상 비서의 긴급 보고도, 차 회장의 위압적인 호출도, 주가 하락에 따른 압박도 없었다. 오직 서로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만이 그들의 유일한 업무이자 대화였다.

오후가 되자 은호는 테라스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은퇴한 대표님이라지만, 그가 전 세계적으로 구축해둔 정보력과 자금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어제 잡아들인 서지안의 잔당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설 보안팀의 보고를 냉철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차승만 회장이 비자금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는 긴급 뉴스를 마치 남의 일인 양 무심하게 넘겼다.

"은호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이제 회사 일은 잊기로 했잖아요."

봄이 신선한 과일 쟁반을 들고 다가오자, 은호는 노트북을 단호하게 덮고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은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은 봄은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에 몸을 기댔다.

"그냥, 이제 우리가 어디서 살까 행복한 고민 중이었어. 서울은 너무 시끄럽고 눈이 많으니까. 스위스의 조용한 산맥이나 몰디브의 푸른 바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이면 지구 끝 어디든 좋아. 거기서 우리만의 작은 회사를 하나 차려볼까 해. 네가 대표 하고, 난 네 수석 보좌관 하는 거지."

"은호 씨가 내 보좌관이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섹시한 보좌관이겠네요.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이나 하겠어요?"

"비싸기만 하겠어? 밤에는 대표님 서비스가 아주 확실하고 화끈한 보좌관이지. 낮엔 서류 정리하고, 밤엔 대표님 몸 정리해주는..."

은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부드럽게 깨물었다. 그의 손길이 봄의 허벅지 라인을 타고 서서히 올라가자 봄이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는 시늉을 했다.

"은호 씨! 아직 낮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진짜 이대로 괜찮은 거예요? 당신이 평생 일궈온 그 화려한 왕국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는데, 정말 단 1%의 미련도 없어요?"

봄의 진지한 질문에 은호는 장난기를 거두고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는 봄의 두 손을 깍지 껴 꽉 잡고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단단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국은 사라진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 시작되는 거야. 내 왕국은 차가운 건물이나 종이 쪼가리 지분이 아니라, 바로 네 마음속에 있거든. 나 차은호야. 밑바닥 0에서 시작해서 업계 에이스를 만든 놈이라고. 너랑 함께라면 난 어디서든 다시 전설을 쓸 수 있어. 이번엔 누군가를 짓밟아 올라가는 전설이 아니라, 널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여자로 만드는 전설 말이야. 그게 내 인생의 마지막 목표야."

그의 고백은 웅장했고, 그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차은호라는 남자가 가진 진짜 힘은 돈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질 줄 아는 그 압도적인 배포와 순정에 있었다.

그날 저녁, 은호는 별장 앞 모래사장에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와인 잔을 든 두 사람은 타오르는 붉은 불꽃을 보며 영원한 미래를 약속했다. 은호는 수트 주머니에서 아주 단순하지만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재벌가의 화려한 예물용 반지가 아닌, 오직 봄만을 위해 그가 직접 밤을 새워 디자인한 반지였다.

"이봄, 이제 '내 여자' 말고 '내 아내' 해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섹시한 남자의 유일한 아내. 네가 내 옆에서 나를 잡아줘야 내가 괴물이 안 되고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내 모든 구속의 끝은 너였으면 좋겠어."

은호는 파도가 치는 모래 위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거친 파도 소리가 마치 세상의 모든 축복을 대신하는 박수 소리처럼 들려오는 밤이었다. 봄은 벅차오르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은호는 그녀를 부서질 듯 꽉 껴안고 바닷바람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듯 자신의 넓은 코트 안으로 그녀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고마워, 끝까지 내 손 놓지 않고 내 옆에 있어줘서. 사랑해, 이봄."

두 사람은 달빛 아래서 세상에서 가장 길고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것은 지난 20화 동안 이어져 온 모든 오해와 상처, 그리고 치열했던 투쟁을 끝내는 완벽한 종지부이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낙원을 선포하는 시작의 서막이었다.

 

1년 뒤, 뉴욕의 어느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거리.

새로 오픈한 '스프링(Spring) 커뮤니케이션'의 사무실은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이곳의 대표는 실력으로 뉴욕을 사로잡은 이봄이었고, 그녀의 곁에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좌하는 수석 파트너가 있었다. 검은색 수트를 완벽한 핏으로 차려입고, 모델보다 더 뛰어난 피지컬을 자랑하는 그 파트너는 뉴욕 사교계와 비즈니스 정글에서 가장 섹시하고 미스터리한 남자로 통했다.

"대표님, 다음 투자자와의 미팅까지 딱 10분 남았습니다. 그전에... 개인적인 보좌관 업무 좀 수행해도 될까요?"

사무실 문을 잠그며 천천히 다가오는 은호의 낮은 목소리에 봄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은호는 그녀의 책상 위에 걸터앉아 넥타이를 살짝 풀어헤치며 치명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셔츠 위로 드러난 단단한 가슴 근육의 윤곽이 봄의 심장을 다시금 세차게 뛰게 했다.

"어떤 업무요? 차 보좌관님? 여긴 공적인 장소인데요."

"대표님의 입술 상태와 심박수를 확인하는 아주 중요한 업무지. 이건 내 생존이 걸린 일이라 미룰 수가 없거든."

은호는 봄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고 깊게 입을 맞췄다. 사무실 안에는 두 사람의 애정 가득한 열기와 신뢰가 가득 번져 나갔다. 차은호는 더 이상 차가운 재벌가의 황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꿈을 묵묵히 지원하고, 그 곁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단 한 사람의 남자가 되었다.

몰락한 왕국의 전설은 끝났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함께 써 내려가는 새로운 전설은 이제 막 찬란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섹시한 대표님' 차은호와 그의 영원한 뮤즈 이봄. 벼랑 끝에서 시작된 그들의 위태로웠던 사랑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화려한 낙원을 완성하며 영원한 해피엔딩의 마침표를 찍었다.


[에필로그]
차 회장은 교도소에서 자신의 아들이 뉴욕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전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하게 웃으며 독백했다고 한다. "결국, 내가 갖지 못한 걸 저놈은 가졌구나." 한편, 서지안은 출소 후 세간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차은호는 매년 봄이 되면 뉴욕 한복판에서 이봄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을 바친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변함없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내 인생 최고의 비즈니스는, 바로 널 내 여자로 만든 거야. 수익률은 측정 불가, 만족도는 영원히 무한대지."

그의 섹시한 목소리는 여전히 이봄의 심장을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뛰게 만드는 단 하나의 주문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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