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저장 중

로맨스 소설 - "미남 약사와 아리따운 회사원"💕

빛나는 빛나 2025. 12. 1. 21:29
반응형

 

 

 

 

 

로맨스 소설 - "미남 약사와 아리따운 회사원"💕

 

 

제목 - <미남 약사와 아리따운 회사원>


1화. 위장약과 이재욱 약사님

김미소는 출근길 지하철에서부터 이미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숨 막히는 인파 속에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는 순간부터, 그녀의 위장은 불길한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객차 안은 마치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응축된 거대한 압력솥 같았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고, 들고 있는 가방의 끈이 팔을 스쳤다. 작은 밀침에도 중심을 잃을 뻔한 미소는 가까스로 기둥을 붙잡고 균형을 유지했다. 출근 전부터 이미 하루치 체력이 반쯤 소진된 기분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몰려드는 사람들과 엇갈리는 발걸음들 사이에서, 미소는 한숨을 삼켰다. 이런 출근길이 이제는 익숙해야 했지만, 익숙함은 결코 편안함이 아니었다. 회사가 위치한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은 이름만큼이나 치열한 전쟁터였다. ‘영앤리치’들이 활보하는 거리, 반짝이는 대기업 빌딩들이 줄지어 선 그곳에서, 미소의 하루는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고운 인상이었다. 잔잔한 눈매와 또렷한 입술선, 고요한 분위기까지. 하지만 그런 외모가 무색하게도 그녀의 생활에는 늘 피로가 어울려 있었다. 스트레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그녀의 위장은 그 그림자를 가장 먼저 알아채곤 했다. 매번 틈만 나면 속이 뒤틀리고, 쓰리고, 답답했다.

“김미소 씨, 어제 내가 보낸 보고서 파일, 이름만 바꿔서 다시 보낸 거 아니죠? 이 정도 성의면 그냥 야근합시다. 내일 오전에 다시 보죠.”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팀장의 말은 가시 덩굴처럼 미소의 마음을 질끈 조였다. 그녀의 손끝이 순간 굳었다. 사실 그 보고서 때문에 새벽 두 시까지 화면 앞을 떠나지 못했다. 수정사항도 꼼꼼히 반영했고, 문장 하나하나 다시 읽어가며 고쳤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노력’과 ‘트집’ 사이에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미소는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속에서는 뜨거운 울분이 치밀었다. 심장이 쿵쿵대며 위가 눌리는 기분. 단 한 마디에도 위산이 폭발하듯 올라왔다. 아침부터 식욕이 사라졌고, 물 한 모금조차 부담스러웠다.

오전 업무는 언제나처럼 고된 반복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시계 초침 소리마저 귀에 거슬렸다. 결국 점심 무렵, 참았던 통증이 정점을 찍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싸늘한 느낌, 그리고 울렁거림. 이대로 자리에 앉아 있다가는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얇은 가디건을 걸쳤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게 밝았다. 하지만 그 밝음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감싸 쥔 채, 회사 건물 출입구를 빠져나왔다. 바깥 공기가 차갑게 얼굴을 스쳤다. 회사 건물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늘봄 약국'으로 향했다. 그곳은 언제나 그녀의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는 작은 요새였다.

늘봄 약국은 크지 않았지만 햇살이 잘 들어 따뜻했고, 무엇보다 미남 약사 이재욱이 있었다. 미소는 늘봄 약국에 들어설 때마다 마치 연예인 팬미팅 장소에 입장하는 것 같은 기묘한 설렘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재욱 약사는 훤칠하고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짙은 눈썹 아래로 깊은 눈매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차분하고 다정한 미소는, 살벌한 회사 생활로 지친 미소의 심신을 위로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소 씨. 또 오셨어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잔잔했다. ‘또’라는 말 속에도 나무람이 아니라 걱정이 묻어 있었다. 미소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회사 스트레스로 약국 단골이 되어버린 자신이 괜스레 부끄러웠다.

“네, 약사님. 오늘은 좀 심해서요. 아침부터 너무 시달려서… 속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 같아요.”

미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늘 이 약국에 오면 필요 이상의 솔직함이 튀어나왔다. 재욱은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소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예쁜 눈 밑으로 거뭇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미소 씨, 잠깐 이쪽으로 앉아보세요. 평소 드시던 약 말고, 오늘은 위장 진정제랑 소화 효소가 같이 들어있는 걸로 좀 드릴게요.”

재욱은 능숙하게 약병을 꺼내면서도 미소에게 의자에 앉아 잠시 쉬라고 권했다. 미소가 약국 구석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 의자에 앉자, 그는 물 한 잔과 함께 약을 건네주었다.

“이 약은요, 지금 미소 씨처럼 스트레스 때문에 위산이 과다하게 분비되고, 그로 인해 위 점막이 헐었을 때 효과가 좋아요. 그리고 이 비타민 하나만 같이 드세요. 점심 거르지 마시고요.”

재욱은 약을 설명하며 조심스럽게 미소의 눈을 맞췄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일과 무관한, 순수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에 미소는 또 한 번 무너졌다. 이 좁은 약국에서 이 짧은 순간만큼은, 그녀가 회사의 소모품이 아니라 소중하게 보살핌 받아야 할 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약을 받아 든 미소는 습관처럼 재욱의 외모에 대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다정함에 대한 미소 나름의 보답이자, 칭찬하고 싶다는 충동적인 감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약사님은 이렇게 잘생기셨는데 왜 약국을 하세요? 연예인 하셨으면 팬클럽 생겼을걸요.”

미소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재욱은 미소의 말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화려하거나 기교적이지 않았고, 정말로 기쁘다는 듯 순수하게 번져나갔다.

“하하, 제가 이 약국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미소 씨처럼 지친 분들께 약과 함께 위로를 드릴 수 있는 일이 제게는 더 큰 보람입니다.”

그의 말이 너무나 진심이어서, 미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단순한 ‘잘생긴 약사님’이라는 타이틀을 넘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약국을 나서는 미소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와 달리 가벼웠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씨앗 하나가 심어진 듯했다.


2화. 위로와 공감, 가까워지는 거리

미소는 늘봄 약국에서 위장약을 복용한 후,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위장의 통증은 잠시 멈췄을지 몰라도, 마음속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은 여전했다. 특히, 팀장의 부당한 지적과 회사 내의 치열한 경쟁 구도는 27세의 미소에게는 버거운 짐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미소는 오늘 팀장이 자신에게 떠넘긴 '납기일이 이틀 남은 급한 보고서' 때문에 또다시 야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근 후 친구와의 약속은 취소해야 했고,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갇혀 홀로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현실이 그녀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결국 오후 7시, 모두가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서 미소는 차가운 커피를 홀짝이며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잠깐 휴식을 취하려 휴대폰을 들었는데, 문득 ‘늘봄 약국’의 이재욱 약사가 생각났다. 그에게 연락할 용기는 없었지만, 그가 오늘 아침에 준 따뜻한 위로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미소는 결국 보고서 검토를 핑계 삼아 다시 늘봄 약국으로 향했다.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기대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국 앞에는 이미 'Closed' 팻말이 걸려 있었다. 미소는 약국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미소 씨?”

익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미소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재욱이 약국 옆 작은 창고 문을 잠그고 서 있었다. 그는 흰 가운 대신 단정한 네이비색 니트와 슬랙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약사 가운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멋있어 보였다.

“어? 약사님! 죄송해요, 문 닫으신 거 알면서도 그냥… 혹시나 해서 와봤어요. 보고서 때문에 너무 답답해서요.”

미소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즉흥적이고 어색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재욱은 그런 미소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보고서 때문에 또 위가 아픈 건 아니고요? 제가 아까 드린 약 효과는 좀 있었나요?”

“네, 약은 잘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 너무 심해요. 제가 쓴 보고서인데, 팀장님이 저한테 파일 이름만 바꾼 거 아니냐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서요. 정말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요. 저는 정말 밤새서 열심히 했는데….”

미소는 결국 참고 있던 서러움을 터뜨리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그것도 이렇게 잘생긴 약사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사실이 몹시 창피했지만, 재욱의 걱정 가득한 눈빛 앞에서 방어막이 무너졌다.

재욱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근처 편의점을 가리켰다.

“여기서 서서 얘기할까요? 미소 씨가 지금 겪는 감정은 억울함만이 아닐 거예요. 자존감이 상한 거죠. 저랑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면서 얘기해요. 저는 퇴근했으니까 이제는 약사가 아니라 그냥 이재욱이에요.”

재욱의 제안에 미소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구석 테이블에 마주 앉자, 재욱은 따뜻한 온음료를 미소에게 건넸다. 약이 아닌 따뜻한 음료는 미소의 속을 부드럽게 감쌌다.

“약사님… 아니, 재욱 씨는 회사를 다녀보신 적이 없어서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저희 회사는 진짜 전쟁터 같아요. 여자 동기들은 저를 견제하고, 남자 동기들은 제가 예쁘다는 이유로 업무 능력을 무시하고… 팀장님은 저한테 감정 쓰레기통처럼 대하세요.”

미소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회사에서의 애로사항을 재욱에게 술술 털어놓았다. 재욱은 미소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경청했다.

“미소 씨가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 저는 미소 씨의 위장약 복용 횟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미소 씨는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지 않고 실력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진심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 때 오는 억울함이 가장 독한 스트레스라는 걸 저는 알아요.”

재욱의 말은 미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정확히 꿰뚫었다. 미소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공감은 위장약보다 더 빠르게 마음속 고통을 진정시켰다.

“미소 씨. 저는 약사로서 약을 처방하지만, 결국 스트레스와 억울함에는 약이 없어요. 미소 씨는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미소 씨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거예요. 저한테 털어놔줘서 고마워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언제든지요.”

그가 진심을 담아 내민 위로의 손길에, 미소는 그를 향한 감정이 단순한 호의를 넘어섰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욱이라는 남자는, 자신에게 세상의 모든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텅 빈 편의점 테이블에서 한 시간 넘게 서로의 사적인 대화를 공유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미소는 그가 가진 깊은 다정함과 포용력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재욱은 아름다운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지켜주고 싶다는 보호 본능을 느꼈다.


3화. 호기심과 자각

편의점에서 위로를 받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김미소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다. 회사에서는 어김없이 스트레스가 미소를 옥죄었지만, 이젠 위가 아플 때마다 ‘늘봄 약국’의 이재욱 약사를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위장약이 필요해서 약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재욱의 다정한 얼굴과 목소리가 필요해서 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단순한 약사와 손님 이상의 감정이 명확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소는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합리화를 시도했다. ‘그래, 그는 내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상담사 같은 거야. 전문 약사로서 나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니까 내가 호감을 느끼는 거지. 당연한 심리야.’ 하지만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재욱이 건넨 따뜻한 차와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을 되새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존재는 이미 미소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수요일 오후, 미소는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의 팀 배정 문제로 또다시 불쾌한 상황에 놓였다. 미소는 눈에 띄는 능력을 갖췄지만 팀장은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느꼈던 걸까, 미소는 또다시 가시밭길이 예상되는 팀에 배정되었다. 속이 메스꺼웠지만, 오늘은 딱히 위장 통증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소는 결국 퇴근길에 약국으로 향했다. 위장약 대신, 핑계거리가 필요했다.

“약사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위장약 사러온 거 아니에요.”

미소는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며 평소보다 밝게 인사를 건넸다. 재욱은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미소는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오늘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휘발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미소 씨. 정말 오늘은 얼굴빛이 지난번보다 훨씬 좋네요. 제가 드린 비타민 열심히 챙겨 드셨나 봐요.”

재욱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미소는 재욱의 앞에 섰다.

“오늘은 종합 비타민 좀 사려고요. 요즘 만성 피로가 너무 심해서요. 직장인들은 비타민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해서요.”

미소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욱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대에서 고함량 비타민 제품을 꺼냈다.

“종합 비타민도 좋지만, 미소 씨는 스트레스성 위장 장애가 심하니, 비타민 B군 중에서도 흡수가 빠른 활성형 비타민이 좋을 거예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꼭 밥 드시고 드셔야 합니다.”

재욱은 약을 포장하며 그녀에게 주의사항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미소는 문득 지난번 약국에서 그에게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그때는 너무 취약한 상태였기에 그저 충동적인 칭찬으로 흘려보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그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다.

“재욱 씨, 다시 봐도 정말 아깝다니까요. 약국에만 계시기에는. 며칠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진짜 연예인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친구들한테 재욱 씨 사진 보여줬더니, 난리가 났었어요. ‘동네 약사’가 저렇게 잘생긴 게 말이 되냐고요.”

미소는 살짝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재욱은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동네 약사’라는 말에 미묘한 표정이 스쳤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하하, 제가 그렇게 잘생겼나요? 과찬이십니다. 미소 씨 친구분들은 미소 씨 외모를 보고 난리가 날 텐데요.”

재욱은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미소는 그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정말로 미소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욱은 곧 시선을 낮추어 미소의 눈 주변을 응시했다.

“미소 씨는 정말 아름다운 분이에요. 인정합니다. 그런데, 미소 씨의 그 예쁜 눈이 늘 지쳐 보여요. 저는 미소 씨가 웃을 때 이 눈가에 주름이 지는 게 좋아요. 지금처럼요. 약사로서 저는 미소 씨가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약국에 안 오셨으면 좋겠어요.”

재욱의 말은 미소의 심장 깊은 곳을 울렸다.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외모만을 칭찬했지만, 그녀의 ‘지친 표정’을 읽어내고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사람은 재욱뿐이었다. 미소는 자신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빛에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저는… 이제 위장약 말고, 재욱 씨 보러 오는 횟수가 늘어서 큰일이에요.”

미소는 무심결에 본심을 털어놓았다. 재욱의 얼굴에 미묘한 긴장이 스쳤다. 그는 잠시 포장된 비타민을 매만지다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미소 씨가 와주시는 게 좋아요. 위장약 말고, 그냥 안부만 물으러 와주시면 더 좋고요.”

그의 말이 미소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했다. 이것은 분명히 서로가 서로에게 사적인 호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미소는 부끄러움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약값을 계산했다. 약국 문을 나서자, 미소는 더 이상 위장 통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욱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가장 강력한 진통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소박한 삶에, 잘생기고 다정한 약사와의 로맨스라는 달콤한 꿈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4화. 경계와 배려, 약 대신 차 한 잔

재욱에게 호감을 표현한 이후로, 김미소는 약국에 가는 횟수를 조금 줄였다. 너무 자주 가면 그가 부담을 느낄까 봐, 혹은 자신의 감정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약국을 멀리하자 스트레스는 더욱 쌓였고, 결국 수면 장애까지 겪게 되었다.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출근한 미소의 얼굴은 여과 없이 지쳐 보였다. 중요한 회의에서 실수를 저지르자 팀장의 잔소리가 쏟아졌고, 미소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오후 3시, 결국 미소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늘봄 약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위장약뿐만 아니라, 수면제까지 처방받아야 할 것 같았다.

“재욱 씨….”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미소는 카운터에 기대어 힘없이 재욱을 불렀다. 재욱은 진열대에서 약을 정리하고 있다가 미소의 목소리를 듣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안색은 지난번보다 훨씬 창백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미소 씨! 무슨 일이에요? 위가 또 심해졌나요?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재욱은 다급하게 미소의 상태를 살폈다. 미소는 겨우 테이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위장약이랑… 수면 유도제 좀 주세요. 이틀 밤을 거의 못 잤어요. 회사 일도 안 풀리고, 머리는 계속 팽팽 돌고,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요.”

미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재욱은 잠시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는 약사로서의 책임감과, 그녀의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이재욱으로서의 마음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미소 씨, 오늘은 약 대신 제가 특별한 처방을 해드릴게요.”

재욱은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 뒤쪽 서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는 맑고 푸른색을 띠는 허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는 포트에서 따뜻한 물을 끓여 투명한 머그잔에 따라 미소에게 건넸다. 은은한 라벤더와 캐모마일 향이 약국 안에 퍼졌다.

“이건 제가 잠 못 이룰 때 마시는 차예요. 캐모마일과 라벤더, 그리고 심신 안정에 좋은 특수 허브 블렌딩인데,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오늘은 수면 유도제 대신 이걸 마시고, 딱 세 가지만 저와 약속해요.”

재욱은 약을 주지 않았다. 그는 미소의 상태가 약물에 의존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미소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약국에서 약이 아닌 차를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첫째, 퇴근 후 9시 이후에는 휴대폰과 컴퓨터를 완전히 끄세요. 둘째, 잠자리에 들기 30분 전에 이 차를 마시세요. 셋째, 회사에서의 모든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세요. 미소 씨는 회사일에서 잠시 벗어날 권리가 있어요.”

재욱은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미소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약사로서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사적인 영역까지 깊숙이 들어와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당장 약을 먹지 않으면, 오늘 밤도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미소 씨의 몸은 이미 너무 많은 약에 익숙해져 있어요. 오늘은 약 대신 저를 믿고 이 차를 마시고 가세요. 제가 미소 씨의 수면을 위해 약속을 지킬 거예요. 만약 오늘 밤 잠을 잘 못 잔다면, 내일 아침 저를 찾아오세요. 그때는 제가 책임지고 미소 씨를 혼내주고 다시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재욱은 미소의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책임지고 혼내준다’는 장난기 섞인 말에 미소는 오랜만에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미소는 재욱이 자신을 단순한 고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보았지만, 이재욱은 그녀의 지친 위장과 잠 못 이루는 밤을 보았다. 그는 미소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치유하려 했다.

“네, 재욱 씨. 약속할게요. 차 정말 고마워요. 마음이 벌써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미소는 차를 마시며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찻값을 계산하려 하자, 재욱은 이 차는 '특별 처방'이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미소는 약국을 나서며, 재욱이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자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단순히 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친 삶의 위로와 평안을 사러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욱은 기꺼이, 아니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었다.


 5화. 약속된 안식처, 일상의 공유

재욱의 ‘특별 처방’ 덕분이었을까. 미소는 그날 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가 맑고 몸이 가벼웠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평소보다 훨씬 활기찬 모습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 식사 후, 재욱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낼까 잠시 망설였지만, 너무 사적인 행동일까 싶어 관두었다. 대신, 퇴근 후 약국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미소는 그날 오후 6시 정각에 늘봄 약국을 방문했다. 이미 그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늘봄 약국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늘봄 약국은 더 이상 약을 사는 곳이 아니었다. 회사라는 전쟁터와 차가운 집 사이를 잇는, 약속된 ‘안식처’가 되었다.

“미소 씨! 어서 오세요. 잘 주무셨나요? 얼굴이 어제랑 완전히 달라요.”

재욱은 미소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는 성공적인 처방에 대한 기쁨과, 미소를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는 사적인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네, 재욱 씨 덕분에 정말 푹 잤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맑게 잔 건 오랜만이에요. 차 정말 고마워요. 이건 꼭 돈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미소는 웃으며 카운터에 지갑을 꺼냈다. 재욱은 미소의 손을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미소 씨. 저는 약사이고, 미소 씨는 제 환자이자… 손님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미소 씨의 건강이 회복되는 것이 가장 큰 보상이에요.”

그의 말은 여전히 선을 지키고 있었지만, 미소는 그 선 너머에 있는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재욱은 카운터 아래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미소에게 건넸다.

“혹시나 해서요. 어제 그 차 블렌딩을 조금 더 담아봤어요. 잠 못 이룰 때마다 마시고요. 그리고 이건 비타민 C 캔디예요. 일하다 지칠 때 하나씩 드세요.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으시면 단 걸 보충해줘야 해요.”

봉투 안에는 작은 지퍼백에 담긴 허브와, 예쁜 포장지에 담긴 비타민 캔디가 들어 있었다. 미소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것은 단순한 상술이나 친절이 아니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의 힘든 일상을 이해하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재욱 씨…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회사에서 버틸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미소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그 순간, 재욱은 미소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미소 씨. 혹시 오늘 저녁 약속 있으세요? 아니면… 잠깐 약국 문 닫기 전에, 미소 씨 회사에서 오늘 있었던 일, 조금만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미소 씨가 웃는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요.”

재욱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사적인 대화 시간을 요청했다. 지난번 편의점에서 만남 이후로, 그는 미소와 나누는 사적인 대화가 자신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가장 큰 위로임을 깨달았다. 미소 또한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좋아요. 오늘 팀장이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서 제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아세요? 제가 얼마나 똑 부러지게 거절했는지 재욱 씨한테 자랑하고 싶어요.”

미소는 환하게 웃으며 테이블 의자에 다시 앉았다. 재욱은 약국 문을 반쯤 닫고,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미소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미소는 오늘 팀장과의 사소한 다툼, 동료들의 견제, 그리고 성공적으로 처리한 업무 성과에 대해 조잘거렸다. 재욱은 맞장구를 치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칭찬을 건네며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와, 미소 씨가 그렇게 카리스마 있게 대처했을 줄은 몰랐어요. 역시 제가 생각한 대로 강단 있는 분이었네요.”

재욱의 칭찬에 미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재욱은 그 웃음을 보며 미소를 지켜주고 싶다는 보호 본능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약국은 점차 두 사람만의 작은 밀실이 되어갔다. 그들은 약에 대한 대화뿐만 아니라, 주말 계획, 좋아하는 영화, 소소한 취미 생활까지 공유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약사와 손님 관계에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로 진화하고 있었다. 미소에게 늘봄 약국은 단순한 약국이 아니라, 사랑이 피어나는 안식처 그 자체였다. 재욱 역시 미소와의 대화를 통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삶에서 부족했던 '순수한 위로'를 얻고 있었다.


6화. 첫 외부 약속, 선을 지키는 존중

김미소는 최근 들어 위장약이 필요하지 않은 날에도 늘봄 약국에 들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약국에 가기 위한 핑계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퇴근 후 잠시 들러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재욱과 짧게 대화를 나누는 10분 남짓한 시간이 미소의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재욱은 항상 따뜻한 차나 비타민 캔디를 건네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미소는 그의 변함없는 다정함 속에서 안식과 평온을 찾았다.

하지만 미소는 여전히 그들의 관계에 미묘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재욱은 자신에게 호의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약사’라는 선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모든 행동은 지극히 순수하고 전문적인 배려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다. 미소는 가끔 그 선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재욱이 얼마나 신중하고 진중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 미소는 일주일간의 지독한 업무를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늘봄 약국으로 향했다. 오늘은 약국에 오래 머물며 재욱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다. 약국 앞에는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친 재욱이 셔터를 내리는 중이었다.

“재욱 씨! 저 왔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오늘도 야근하느라….”

미소가 말을 건네자, 재욱은 셔터를 내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퇴근 준비를 마친 그는 흰 가운을 벗고 있었다. 깔끔한 흰 셔츠에 단정하게 접어 올린 소매가 그의 남성적인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미소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었다.

“미소 씨, 오셨네요. 괜찮아요. 오늘은 약국 문 닫는 시간이라 아쉽지만….”

재욱은 말을 멈췄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평소와 달리 사적인 제안을 건넸다.

“미소 씨,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오늘 저녁 같이 할까요? 제가 약국 근처에 아주 괜찮은 솥밥 집을 알고 있어요. 일주일 동안 고생 많으셨는데, 제가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요. 약사로서가 아니라, 이재욱이라는 남자로서요.”

재욱은 제안을 하면서도 미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느껴졌고, 미소는 그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미소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왔던 순간이었다. 이제야 그들의 관계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소는 순간 망설였다. 재욱이 '약사로서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음에도, '동네 약사'라는 그의 소박한 배경과 자신의 '강남 회사원'이라는 현실이 묘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미소는 재욱을 좋아했지만, 그와의 관계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의 시선, 혹은 자신만의 행복한 상상이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재욱 씨… 고마워요. 정말 감동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미소는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저, 오늘은 회사 일 때문에 너무 지쳐서요.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죄송해요.”

재욱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미소는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재욱은 이내 표정을 다잡고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제가 너무 급했나 봐요. 미소 씨가 피곤하시다면 당연히 쉬셔야죠. 제가 미소 씨 건강을 위해서도 절대 무리시키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는 실망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재욱은 미소의 거절을 존중했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도 압박을 주지 않았다.

“그럼 제가 오늘은 이만 갈게요. 내일 푹 쉬시고, 월요일에 활기찬 얼굴로 약국에 들러주세요. 위장약은 필요 없길 바라면서요.”

재욱은 끝까지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을 남기고는 셔터를 완전히 내렸다. 미소는 재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거절이 재욱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봐 걱정되었다. 동시에, 이렇게 다정하고 진중한 남자의 제안을 거절한 자신에게 후회감이 밀려왔다.

미소는 깨달았다. 재욱은 그녀의 세상에 진입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는데, 정작 미소 자신이 현실의 벽 앞에서 머뭇거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존중과 배려 덕분에, 미소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는, 진정한 어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그의 손을 잡겠다고 미소는 혼자 다짐했다. 이 작은 거절은 그들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단계를 위한 굳은 약속이 될 것임을 예감하면서.


7화. 경계를 넘어선 첫 만남

금요일의 거절 이후, 김미소는 주말 내내 이재욱 약사에게 미안한 마음과 다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조급함 사이에서 갈등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그녀는 마치 숙제를 하듯 출근길에 재욱에게 간단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주말 잘 보냈는지 묻는 형식적인 안부였지만, 그녀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재욱에게서 답장이 왔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미소 씨도 오늘 활기찬 하루 보내시길 응원합니다." 짧지만 따뜻한 메시지에 미소는 안도했다. 그들의 관계가 서먹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주 내내 미소는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팀장이 던져준 까다로운 고객사와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복잡했던 계약 건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수요일 오후, 미소는 그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다. 팀장은 마지못해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던졌지만, 미소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회사 사람들의 인정보다, 단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축하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재욱에게 전하고 싶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미소는 늘봄 약국으로 달려갔다. 약국에 들어서자마자 미소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카운터에 손을 짚었다.

“재욱 씨! 저 드디어 해냈어요! 그 지긋지긋했던 프로젝트! 제가 완전히 마무리 지었어요. 팀장도 뭐라 말 못 하고 그냥 넘어갔어요! 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기분이에요.”

미소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재욱을 바라봤다. 재욱은 가운을 입은 채 환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의 눈빛은 칭찬과 축하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잘했어요, 미소 씨! 제가 미소 씨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고 있었어요. 위장약 복용 횟수가 증명해줬죠. 정말 축하드립니다.”

재욱은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쳐주었다. 미소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온몸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재욱은 그녀의 상태를 단번에 눈치챘다.

“오늘은 약 대신 축하를 드릴게요. 미소 씨.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재욱은 재빨리 약국 문을 닫고, 가운을 벗었다. 그는 미소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오늘은 약국 밖에서 만나요. 제가 미소 씨의 승리를 위해 커피를 한 잔 대접하고 싶어서요. 약국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어요. 딱 30분만요.”

미소는 지난번 저녁 식사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 떠올라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재욱 씨가 사주시는 커피, 꼭 마시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늘봄 약국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 짧은 50미터의 거리가 미소에게는 엄청난 경계를 넘는 것 같았다. 약국 안에서는 약사와 손님이었지만, 약국 밖, 평범한 거리에서는 그저 퇴근 후 함께 차를 마시러 가는 남녀였다.

카페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아늑한 곳이었다. 재욱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미소는 달콤한 바닐라 라떼를 시켰다. 마주 앉은 테이블에서, 재욱은 미소를 향해 진심으로 건배를 제안했다.

“미소 씨의 눈부신 성과를 축하하며. 앞으로도 위장약은 필요 없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재욱 씨 덕분이에요. 재욱 씨가 옆에서 응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또 스트레스에 무너졌을 거예요. 고마워요.”

커피를 마시며 나눈 대화는 평소 약국에서의 대화보다 훨씬 사적이고 깊었다. 미소는 재욱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꿈에 대해 이야기했고, 재욱은 자신이 왜 안정적인 병원 약사 대신 동네 약국을 택했는지, 자신의 소신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미소는 재욱이 정말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 돈보다는 사람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따뜻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임을 확신했다. 그의 단정한 니트와 차분한 말투는,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세 가득한 남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풍겼다.

30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카페를 나서는 미소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그들의 관계는 이제 단순히 '약국에서의 대화'라는 업무의 경계를 넘어섰다. 이제 두 사람은 사적인 만남을 시작한, 묘한 설렘이 감도는 연인 직전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미소는 재욱에게서 온전히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위장약이 필요 없는, 진정한 행복감이 피어났다.


8화. 고백의 결심과 숨겨진 비밀의 무게

이재욱 약사는 카페에서의 30분 만남 이후,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었다. 그는 미소의 행복한 미소를 보며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음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이 그를 짓눌렀다. ‘동네 약사’로서의 삶은 그에게 일종의 안식처이자, 화려한 가족 배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였다. 그 안식처가 바로 미소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늘봄 약국’은 재욱의 아버지 소유였고, 그는 원하면 언제든지 더 크고 화려한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늘봄 약국’의 약사 이전에, 국내 굴지의 의약품 회사인 S제약의 사외이사였고, 그 회사의 최대 주주인 회장님의 조카였다. 그는 가족의 기대와 의무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의 소신대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이 작은 약국을 고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에게만큼은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부유한 배경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약사 이재욱’을 좋아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미소는 그의 겉모습이 아닌, 다정함과 진심에 반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점이 재욱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재욱은 약국 카운터에 앉아 미소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수십 번이나 썼다가 지웠다. 더 이상 이렇게 모호한 관계로 미소를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하고, 연인이 되어 더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소 씨는 평범하고 소박한 나의 삶을 사랑하고 있어. 만약에 내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그녀는 나에게서 실망할까? 아니면 오히려 부담을 느껴 도망칠까?’

재욱은 두려웠다. 미소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화려한 배경은 그녀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짓 위에서 사랑을 쌓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놓을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고백을 먼저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고백 이후,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완전히 믿어줄 때, 그때 모든 것을 말할 계획이었다.

다음 날, 미소가 늘봄 약국에 들렀을 때, 재욱은 평소와 달리 왠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미소는 그가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인다고 생각하며 가슴이 설렜다.

“재욱 씨, 오늘따라 왜 이렇게 경직되어 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미소가 웃으며 물었다. 재욱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미소 씨. 저… 미소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재욱은 약국 문을 잠시 닫고, 미소를 카운터 테이블 의자에 앉혔다. 그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소 씨. 저는 미소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소 씨의 지친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지 않으려는 그 눈 속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약사로서 미소 씨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재욱이라는 남자로서 미소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재욱의 목소리는 진중하고 떨림이 없었다. 그는 미소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소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녀가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다.

“저는 미소 씨에게 매일 약이 아닌, 평생의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와 정식으로 연애해 주시겠어요? 약국에서의 만남이 아닌, 밖에서 데이트도 하고, 미소 씨의 주말을 제가 책임지고 싶어요.”

재욱의 진심 어린 고백에 미소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이미 그의 다정함에 반해 있었고, 이 고백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미소는 눈물을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네, 재욱 씨. 저도 재욱 씨를 좋아해요. 물론이죠. 우리, 오늘부터 1일이에요.”

두 사람은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재욱은 안도감과 기쁨에 미소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지만, 약국이라는 장소와 미소의 조심성을 고려해 참고, 대신 미소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무거운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S제약 사외이사'라는 자신의 신분. 이 행복한 순간 뒤에, 그 진실을 어떻게 미소에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는 재욱의 복잡한 심경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는 우선 이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9화.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미소

이재욱의 진심 어린 고백을 받은 후, 김미소의 세상은 180도 달라졌다. 만성적인 위장 통증이 사라졌고, 회사의 스트레스도 왠지 모르게 가벼워진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가 떠올랐고, 동료들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미소는 재욱과의 연애에 완전히 푹 빠졌다. 그들의 연애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말에는 재욱의 약국 근처 소박한 맛집에서 밥을 먹거나, 동네 공원에서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미소는 재욱이 그녀에게 사준 화려한 명품 가방이나 값비싼 식사보다, 공원에서 함께 나누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그의 진심 어린 눈빛에서 더 큰 행복을 느꼈다.

미소에게 재욱은 완벽한 남자친구였다. 잘생긴 외모는 기본이고, 항상 그녀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다정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소신과 진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재욱은 미소가 자신을 '동네 약사'로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의 삶은 소박하고 안정적이었으며, 그녀의 복잡하고 스트레스 가득한 회사 생활과는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평범한 약사님과 예쁜 회사원의 로맨스.’ 미소는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들었다.

토요일 오후, 두 사람은 재욱의 약국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동네 책방에 들렀다. 재욱은 미소에게 건강 관련 서적을 추천해주었고, 미소는 재욱에게 베스트셀러 소설을 추천해주었다.

“재욱 씨는 참 신기해요. 이렇게 잘생기고 능력도 좋으신데, 왜 이렇게 소박하게 사세요?”

미소가 책을 보다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재욱은 살짝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병든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어요. 그때부터 약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꿈을 꿨죠. 화려한 삶은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미소 씨랑 이렇게 따뜻한 책방에서 차 한잔 마시는 행복이 제게는 더 가치가 있어요. 약사로서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고, 남자로서 미소 씨의 아름다운 미소를 지키는 것. 그게 제 삶의 전부예요.”

재욱의 진솔한 이야기에 미소는 감동했다. 그녀는 재욱이 정말로 세상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수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미소는 그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멋있다, 재욱 씨. 저는 강남에서 매일매일 돈과 명예를 쫓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지쳤는데, 재욱 씨를 만나면 제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에요. 저희 이렇게 평생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저는 재욱 씨가 이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모습이 가장 멋져요.”

미소는 재욱에게 기대어 속삭였다. 그녀의 말은 재욱의 심장을 찔렀다. 미소가 진심으로 바라는 '소박한 행복'과 '작은 약국'이라는 이미지가, 재욱의 숨겨진 배경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재욱은 미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이 행복한 순간에 자신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언제 말해야 할까? 지금 이 행복을 깨뜨릴 수는 없는데.’

재욱은 마음속으로 미안함을 되뇌었다. 하지만 미소의 순수한 눈빛을 보며, 그는 아직 진실을 말할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는 미소와의 이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잠시나마 자신의 진짜 신분을 깊숙이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재욱은 미소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따뜻한 포옹을 나누었다. 미소는 침대에 누워서도 재욱과의 소박한 미래를 상상했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 그녀에게는 재욱과의 소박한 사랑이 곧 세상의 전부였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꿈꾸는 재욱과의 소박한 삶 이면에, 거대한 제약회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10화. 뜻밖의 손님과 미소의 질투

미소와 재욱은 공식적인 연인이 된 후, 일상적인 만남에 익숙해졌다. 미소는 매일 퇴근 후 늘봄 약국에 들러 재욱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재욱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블렌딩한 차를 준비해두었다. 미소는 더 이상 위장약을 찾지 않았고, 재욱은 미소의 건강이 완벽하게 회복되고 있음에 행복했다.

화요일 오후, 미소는 회사에서 급하게 필요한 의약품이 생겨 점심시간에 늘봄 약국을 방문했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카운터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미소의 회사 동료인 나경 씨였다. 나경은 미소와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회사 내에서 외모 경쟁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고, 미소에게 은근히 질투심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어머, 미소 씨? 여기 웬일이야? 설마 미소씨도 이 약사님 보러 온 거야? 역시 잘생긴 건 모두가 알아보지.”

나경 씨는 재욱을 향해 과도하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미소에게 말을 건넸다. 미소는 순간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신만의 안식처를 누군가에게 침범당한 기분이었다.

“저는 그냥 회사에서 필요한 약 사러 왔어요.”

미소는 쌀쌀맞게 대답했지만, 눈은 재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재욱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평소의 다정한 미소 대신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나경 씨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나경 씨는 요즘 회사 스트레스 때문에 두통약이 필요하시다고 해서요. 잠시 상담 중이었습니다.”

나경은 재욱의 잘생긴 얼굴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며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현했다.

“약사님은 왜 이렇게 잘생기셨어요? 약사님이 웃으니까 두통이 벌써 사라지는 것 같아요. 저희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약사님 이미 유명해요. 강남에서 제일 잘생긴 약사님이라고요.”

나경의 짓궂은 칭찬과 추파에 재욱은 난감한 듯 보였지만,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소는 재욱이 다른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심장 아래에서 질투심이라는 뜨거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미소는 재욱에게 더 이상 나경 씨와 이야기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카운터로 다가가 나경을 가로막고 필요한 약을 재욱에게 말했다.

“재욱 씨, 저 이 약 급하게 필요해요. 아까 말씀드린 그… 소화제랑 위장 보호제요.”

미소는 필요하지도 않은 위장약까지 덧붙여 말했다. 재욱은 미소의 표정 변화와 억양의 미묘한 차이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는 미소가 질투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경은 재욱의 관심을 돌리려 노력했지만, 재욱은 미소에게만 집중하며 약을 건넸다. 나경이 짜증난 얼굴로 약국을 나가자마자, 미소는 곧바로 재욱에게 따지듯 물었다.

“저 여자, 왜 재욱 씨한테 그렇게 꼬리를 쳐요? 재욱 씨는 왜 또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세요?”

미소의 말투는 누가 봐도 질투하는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 재욱은 미소의 솔직한 질투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나경 씨 앞에서 보여주었던 어색한 미소가 아니라, 미소에게만 보여주는 특별한,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미소 씨, 질투했어요? 저는 미소 씨가 질투하는 모습도 너무 귀여워요. 저는 직업상 모든 손님에게 친절해야 해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오직 미소 씨 한 사람만 있어요. 미소 씨는 저에게 약을 사러 오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온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재욱은 손을 내밀어 미소의 손을 잡았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감싸자 미소는 재욱의 진심 어린 눈빛과 특별한 미소에 곧바로 질투심을 녹여내렸다. 그녀는 재욱이 자신에게 얼마나 진심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미안해요, 재욱 씨. 제가 좀 유치했어요. 그냥… 재욱 씨가 다른 여자한테 친절한 게 싫어서 질투났어요.”

“미소 씨의 솔직함이 좋습니다. 하지만 미소 씨. 저는 미소 씨와 이렇게 매일 만나고, 미소 씨의 건강을 챙기는 이 평범한 삶이 가장 소중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재욱은 다시 한번 미소에게 확신을 주었다. 미소는 그와의 관계가 더욱 단단해졌음을 느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미소는 알지 못했다. 나경이 들고 간 두통약의 포장지에 찍힌 제약회사 로고가, 바로 재욱의 집안이 소유한 S제약의 로고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사소한 만남이 곧 두 사람의 관계를 뒤흔들 거대한 폭풍의 전조가 될 것임을.


11화. 첫 데이트와 털어놓지 못한 비밀

재욱과 미소는 이제 완전한 연인이 되었다. 미소는 재욱과의 관계가 공식화되자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변한 듯했다. 오랜 회사 스트레스와 만성 위장병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재욱은 단순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삶의 안정제이자 비타민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재욱의 다정함과 소신 있는 모습에 완벽하게 반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재욱은 미소에게 근사한 고급 레스토랑 대신, 전에 미소를 데려가려다 거절당했던 작은 솥밥 전문점으로 미소를 데려갔다. 식당은 소박했지만 정갈했고, 재욱은 미소에게 가장 맛있는 메뉴를 추천하며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

“미소 씨, 이 솥밥은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어서 좋아요. 미소 씨 위에도 부담이 없을 거예요.”

재욱은 밥을 덜어주면서도 미소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미소는 그런 재욱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강남의 화려한 데이트 코스나 값비싼 선물이 아닌, 자신을 위한 진심 어린 배려가 담긴 이 소박한 데이트가 미소에게는 가장 특별하게 느껴졌다.

“재욱 씨랑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저한테는 치유 같아요. 저는 이런 소소한 행복이 좋아요. 복잡한 회사 일만 아니면… 이렇게 평생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미소는 웃으며 재욱을 바라보았다. 재욱은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동시에 깊은 침묵에 빠졌다. 미소가 말하는 '소소한 행복'과 '평화로운 삶'은 그가 간절히 바라왔던 것이었지만, 그의 현실은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재욱은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배경에 대해 고백하려고 마음먹고 나왔다. 더 이상 미소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소가 눈을 반짝이며 '평범한 약사'와의 소박한 미래를 꿈꾸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 고백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스트레스를 줄지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미소 씨가 나를 향한 사랑에 완전히 확신을 가질 때, 그때 말해야 해.’

재욱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제약회사 관련 명함을 다시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미소와 함께하는 이재욱의 모습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사 후, 두 사람은 근처 작은 독립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재욱이 미소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 덕분에 미소의 마음은 훈훈했다.

“미소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 주말에는 제가 미소 씨가 좋아하는 거 해드릴게요. 뭐든 말만 하세요.”

“저는 그냥 재욱 씨랑 함께 있는 거면 다 좋아요. 저는 재욱 씨가 평범한 동네 약사라는 게 너무 좋아요. 왠지 마음이 안정돼요.”

미소는 재욱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재욱은 미소를 꽉 안아주었지만,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그녀가 ‘평범한 약사’라는 자신의 모습에 기대는 만큼, 재욱의 비밀은 점점 더 무거운 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미소는 재욱과 나눈 소박한 데이트를 떠올리며 행복하게 잠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남의 화려함 대신,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다. 그녀는 재욱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도 자신의 소박하고 안정적인 삶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평화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12화. 갑작스러운 부재와 이중생활

행복한 첫 데이트 이후, 미소와 재욱은 매일 퇴근 후 약국 앞에서 짧은 만남을 이어가며 연인의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미소는 이제 약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웃음이 나왔고, 재욱은 그녀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에 활력을 얻었다.

그러던 목요일 오후, 미소는 늘봄 약국 앞에서 뜻밖의 공지문을 보았다.

[휴진 안내]
약사 개인 사정으로 인해 금요일부터 다음 주 화요일까지 임시 휴진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늘봄 약국 약사 이재욱)

미소는 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욱 씨,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개인 사정이라니, 무슨 큰일 생긴 거 아니죠?”

재욱은 통화 너머로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소 씨, 죄송해요. 갑자기 집안에 좀 중요한 일이 생겨서 본가로 올라가게 됐어요. 며칠 약국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요. 중요한 일이라… 며칠 동안은 미소 씨 옆에 있어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재욱은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했지만,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딱딱함이 느껴져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쁜 약사'로서의 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이, 괜찮아요. 재욱 씨도 힘들 텐데, 일 잘 마무리하고 몸 잘 챙기세요. 제가 매일 문자 할게요.”

미소는 애써 밝게 말했지만, 갑자기 닥친 재욱의 부재에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평소 회사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때마다 언제든 달려갈 수 있었던 안식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한편, 재욱은 미소와 통화를 끊자마자 약사 가운 대신 최고급 맞춤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서울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에 우뚝 솟은 S제약 본사 사옥 50층, 이사회 회의실에 서 있었다.  그가 미소에게 말했던 '개인 사정'은, 바로 S제약의 사외이사로서 참여해야 하는 분기별 주요 이사회 회의였다.

“재욱아, 너 이제 약국 놀이는 그만하고 본사로 들어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사회가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명심해.”

재욱의 큰아버지이자 S제약의 최대 주주인 이 회장은 싸늘한 목소리로 재욱을 압박했다. 재욱은 회의 내내 날카로운 분석과 전문적인 지식으로 이사들을 압도했지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이 화려하고 차가운 세계가 너무나 싫었다.

재욱은 밤늦게 호텔로 돌아와 미소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아직 일이 많아서요. 미소 씨, 오늘 밤도 잘 자요. 보고 싶습니다.'

미소는 문자를 받고는 안도했지만, 그의 짧은 답변에서 오는 거리감에 또다시 외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재욱이 '바쁜 약사'로서 병원을 방문하거나 중요한 의약품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바쁘고 열심히 살고 있는지를 상상하며, 그의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가 지금, 그녀의 회사 근처에서 흰 가운을 입고 따뜻한 커피를 사주던 평범한 약사가 아니라, 수조 원대 자산을 움직이는 제약회사 이사로서 날카로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재욱의 두 세계는 그가 사랑하는 미소에게만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13화. 회사 보고서 속의 충격적인 진실

재욱이 자리를 비운 사이, 김미소는 회사 업무에 더욱 몰두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리고 재욱에게 자랑스러운 여자친구가 되기 위해 그녀는 모든 에너지를 일에 쏟아부었다.

금요일 오후, 미소는 팀장의 지시로 새로운 프로젝트, 즉 '대규모 제약회사와의 공동 마케팅 및 계약 추진' 건에 대한 시장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미소의 회사는 최근 건강 보조 식품 시장 진출을 위해 대형 제약회사와 손을 잡으려 했고, 그 후보 중 하나가 바로 S제약이었다.

미소는 평소처럼 S제약의 재무 건전성 및 경영진 현황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복잡한 숫자와 그래프로 가득했지만, 미소는 꼼꼼하게 내용을 살폈다. 그러다가 '핵심 경영진 프로필' 섹션에서 그녀의 눈이 멈추었다. 

그곳에는 S제약의 회장과 사장, 그리고 주요 이사들의 사진과 약력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소는 무심코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프로필 사진 중 한 장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날카로운 눈빛, 단정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그의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다. 늘 그녀에게 위장약과 따뜻한 차를 건네주던, 그녀가 사랑하는 바로 그 남자, 이재욱이었다.

사진 아래에 적힌 타이틀은 미소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이 재 욱 (Lee Jae-wook, 32세)]
직책: S제약 사외이사 (Outside Director)
특이사항: S제약 최대 주주(이 회장)의 조카. 약학 박사 학위 보유. 강남구 늘봄 약국 운영.

미소는 보고서를 쥔 손에 힘이 빠져 종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강남구 늘봄 약국 운영.' 그 소박하고 따뜻했던 약국의 이름이, 수조 원 규모의 대형 제약회사의 공식 문서에, '최대 주주 조카'이자 '사외이사'라는 타이틀 옆에 적혀 있었다.

충격과 배신감이 미소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녀가 꿈꾸었던 '소박한 약사님과의 평범한 연애'는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재욱이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다정함과 소박함이, 거대한 재벌 집안의 아들이 벌이는 '취미 생활'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재빨리 보고서 파일을 덮었다. 미소는 눈앞이 흐릿해지며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곧바로 위장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가 그토록 애써 다스렸던 스트레스성 위장병이 한순간에 재발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지? 왜 속였을까? 재욱 씨 약국은, 그럼 나랑 나눴던 그 모든 소박한 대화는… 전부 거짓이었어?'

미소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조차도, 이 거대한 배경을 숨기기 위한 기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당장 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진실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그의 부재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재욱이 말했던 '중요한 집안일'이 바로 이 S제약 이사회 회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미소는 자신이 철저하게 그의 두 번째 삶, 감춰진 삶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소는 차마 회사에서는 약국에 갈 수 없어, 급하게 편의점에서 위장약을 사서 삼켰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았다는 깊은 슬픔만이 남았다. 그녀는 재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모든 것이 오해이기를 바라면서도, 이미 그녀의 이성으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4화. 진실의 폭풍과 미소의 눈물

며칠 후, 이사회 일정을 모두 마치고 약국으로 돌아온 이재욱은 바로 김미소에게 연락했다. 그는 약국 문을 열기 전, 미소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그녀의 이해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야말로 미소가 자신의 진심을 믿어줄 때라고 생각했다.

“미소 씨, 저 약국에 도착했어요. 잠시 얼굴 볼 수 있을까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재욱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조심스러웠다. 미소는 그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미 며칠 동안 준비해왔던 냉정한 가면을 썼다.

“네. 지금 당장 약국 앞으로 갈게요.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미소는 퇴근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재욱의 약국으로 달려갔다. 약국 문은 아직 닫혀 있었고, 재욱은 문 앞에서 미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셔츠에 단정한 슬랙스 차림의 그는, 미소에게 여전히 다정하고 멋진 '동네 약사'의 모습이었다.

“미소 씨, 보고 싶었어요.”

재욱은 반가움에 미소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으려 했지만, 미소는 재욱의 손길을 차갑게 뿌리쳤다.

“미소 씨?”

재욱은 당황했다. 미소의 눈은 이미 며칠 밤을 지새운 듯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구겨진 S제약 보고서 복사본을 꺼내 재욱의 면전에 던졌다.

“이재욱 씨. 이게 뭐예요? 이 사진 속의 이재욱 씨는, 제가 아는 '동네 약사' 이재욱 씨가 아니네요. 'S제약 사외이사'에, '최대 주주 조카'라니. 이거, 장난이에요? 아니면 저를 속인 거예요?”

미소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재욱은 자신이 진실을 말하려고 했던 바로 그 순간, 미소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졌다.

“미소 씨… 미안해요. 제가 말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하지만요? 제가 이 작은 약국의 약사님을 돈 때문에 좋아하는 걸까 봐 걱정했던 건가요? 아니면 제 스트레스가 커질까 봐 보호해줬던 건가요? 재욱 씨, 제가 매일 약국에 와서 위장약을 사가고, 재욱 씨의 소박함에 감동받았던 그 모든 순간이, 재욱 씨에게는 그냥… 취미 생활이었어요? 저를 속이는 게 즐거웠나요?”

미소의 눈에서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재욱의 모든 모습이 기만처럼 느껴졌다.

재욱은 미소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미소는 재욱의 손을 뿌리치고 약국 벽에 기대어 흐느꼈다.

“미소 씨, 제발 진정하고 제 얘기를 들어줘요. 약국은… 약국은 저에게 진심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제약회사 후계자라는 틀에 갇혀 살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사람들에게 돈벌이가 아닌 진짜 약을 주고 싶었어요. 이 약국은 제가 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오직 '약사 이재욱'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어요.”

재욱은 애원하듯 말했다.

“저는 미소 씨가 저의 배경이나 재력이 아닌, 순수한 이재욱의 다정함과 진심을 보고 좋아해주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그래서 이 행복한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말할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미소 씨를 속인 건 잘못이지만, 제가 미소 씨를 사랑하는 마음은 단 한순간도 거짓이 아니에요! 제발 믿어줘요.”

재욱은 간절하게 자신의 진심을 호소했지만, 미소에게는 그의 변명이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재벌 집안과의 거대한 신분 차이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소박한 삶을 꿈꾸던 그녀에게, 재욱의 현실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거짓이 아니라구요? 제가 아는 재욱 씨는 평범한 약사였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다니는 회사와 계약할 수 있는 거대 기업의 이사라구요. 저희는 너무 달라요. 재욱 씨의 세상과 제 세상은… 애초에 만날 수 없는 세계였어요!”

미소는 절규하며 뒤돌아 뛰어갔다. 재욱은 무너지는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숨겨왔던 진실의 폭풍이, 결국 그들의 소중한 사랑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15화. 거리두기와 재발된 상처

미소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이재욱은 넋을 놓고 한참 동안 자리에 서 있었다. 미소의 눈물과 절규는 재욱의 심장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미소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이기심과, 그로 인해 미소가 받은 배신감에 고통스러웠다.

재욱은 미소에게 수십 통의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겨우 연결된 전화에서 미소의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욱 씨. 당분간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지금… 재욱 씨의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됐어요. 재욱 씨의 진심이 무엇인지, 이 모든 상황이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미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거리두기'를 통보했다. 재욱은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알았기에,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미소 씨. 제가 미소 씨에게 큰 상처를 줬어요. 제가 시간을 드릴게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요. 제 사랑은 진심이었고, 미소 씨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저는 변하지 않을 거예요.”

전화가 끊긴 후, 미소는 회사 근처 자신의 자취방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며칠 동안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회사에서는 억지로 웃으며 일했지만, 퇴근 후의 미소는 무너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질문이 맴돌았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을까? 그가 가진 거대한 재력과 권력 앞에서, 나 같은 평범한 회사원이 감히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미소는 그의 진심을 의심하는 동시에, 그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웠다. 그녀가 사랑했던 '약사 이재욱'의 순수한 모습이, 이젠 'S제약 이사'라는 거대한 타이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신분 차이가 만들어내는 괴리감에 압도당했다.

미소는 혼란과 스트레스로 인해 며칠 만에 다시 심각한 위장 통증을 겪기 시작했다. 속이 뒤틀리고 구토 증세까지 나타났다. 재욱이 건네주었던 캐모마일 차는 이미 다 마신 지 오래였다.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결국 편의점에서 위장약과 소화제를 샀다.

미소는 위장약을 물 없이 급히 삼켰다. 그녀가 재욱을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회사 스트레스의 상징인 그 약을 다시 먹는 순간, 미소는 깨달았다. 재욱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평화'와 '치유'는 결국 그가 만든 일종의 안전장치였고, 진실이 드러난 순간, 그녀는 다시 고통스러운 현실로 내던져졌다는 것을.

약의 쓴맛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소는 재욱을 사랑하지만, 그를 사랑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를 짊어질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 관계를 끝내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늘봄 약국 문을 닫은 재욱은 텅 빈 카운터에 기대어 미소에게 차마 전송하지 못한 문자를 보고 있었다. '미소 씨, 위가 아플 때, 혼자 참지 말고 저에게 꼭 연락하세요.' 그는 그녀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감히 다가갈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16화. 침묵의 약속, 행동으로 증명하다

김미소의 단호한 거리두기 선언 후, 이재욱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는 약국 문을 닫고 며칠 동안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미소가 자신에게 상처받은 만큼, 그도 그녀의 부재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재욱은 미소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오직 '행동'으로만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나 돈, 혹은 화려한 배경이 아닌, 미소가 사랑했던 이재욱의 본질을 보여줄 때였다.

그는 미소의 회사에서 작성했던 S제약 관련 보고서 복사본을 기억해냈다. 미소의 회사가 S제약과 대규모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소가 이 프로젝트의 실무 담당자라는 것. 재욱은 이 사실이 미소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으로 작용할 것임을 직감했다.

재욱은 곧바로 S제약 본사로 향했다. 그는 회장에게 사외이사로서의 직책을 내려놓고 싶다고 말했지만, 회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네가 이 계약에 깊숙이 관여해야 한다. 네가 직접 이 계약의 성공을 이끌어야만, 네가 원하는 대로 이 작은 약국 운영을 계속하게 해줄 수 있다.”

재욱은 딜레마에 빠졌다. 그는 회사의 의무를 이용해 미소를 도와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미소에게 해를 가하는 도구가 아닌, 그녀를 지켜주는 방패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재욱은 S제약 본사에서 자신의 개인 비서인 유 팀장을 불렀다.

“유 팀장, 지금부터 미소 씨 회사가 추진하는 계약 건에 대해 실시간으로 보고해 줘요. 특히 김미소 씨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미팅 진행 상황을 가장 자세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제가 이 계약의 성공을 책임지겠다고 회장님께 약속했어요.”

재욱은 표정 없는 얼굴로 업무를 지시했지만,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유 팀장은 재욱의 지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군말 없이 따랐다.

그날부터 재욱은 '동네 약사'의 삶과 'S제약 이사'의 삶을 완벽하게 분리했다. 그는 낮에는 약국 문을 열었지만, 밤에는 S제약 본사 자료를 검토하며 미소의 회사 프로젝트에 대한 전략을 짰다. 그는 미소의 회사가 유리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모든 계약 조건을 재검토했다.

한편, 미소는 재욱이 정말로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자, 더욱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녀는 재욱이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위장약과 수면유도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고, 그녀의 예쁜 얼굴은 다시금 스트레스와 피로에 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더 큰 위기가 미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S제약과의 계약은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었고, 미소는 메인 담당자로서 밤샘 업무를 이어갔다. 그녀의 팀장과 동료들은 그녀의 외모와 실력을 질투하여, 미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미소는 계약서 검토 중, S제약의 유리한 독소 조항들을 발견했다. 이대로 계약이 체결되면 미소의 회사만 손해를 볼 것이 분명했다. 미소는 이 사실을 팀장에게 보고했지만, 팀장은 오히려 미소에게 계약을 무조건 성사시키라고 압박했다.

미소는 갈등했다. 그녀의 건강과 안식처였던 재욱은 이젠 그녀에게 상처를 준 배신자였지만, 미소가 마주해야 할 이 거대한 기업의 이면에 재욱이 있었다. 미소는 재욱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소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그녀의 위장은 더욱 심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17화. 절벽 끝에 선 회사원, 내부의 적

미소와 재욱이 거리두기를 한 지 2주가 흘렀다. 미소의 건강은 최악이었다. 밤에는 불면증, 낮에는 극심한 위경련에 시달렸지만, 그녀는 약국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S제약과의 계약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미소는 자신이 발견한 독소 조항들 때문에 계약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팀장에게 재차 보고했지만, 팀장은 미소의 말을 묵살했다.

“김미소 씨. 당신 지금 우리 회사를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빠뜨리려는지 알아요? S제약과의 계약은 회장의 숙원 사업이야. 당신이 발견했다는 독소 조항? 그건 사소한 거고, 일단 계약부터 성사시켜야 해. 만약 계약이 파기되거나 지연되면, 당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팀장은 미소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했다. 미소는 자신을 둘러싼 회사 내의 질투와 압박을 느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자신만 희생양이 될 것임을 알았다.

결국 S제약과의 최종 계약 전 미팅이 잡혔다. 미소는 떨리는 손으로 미팅 자료를 준비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녀는 이 거대한 싸움에서 자신이 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늘봄 약국에서 유 팀장의 보고를 받고 있던 재욱은 미소의 위기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사님, 미소 씨가 독소 조항을 발견했지만, 상부의 압력 때문에 이를 묵살하고 미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녀는 지금 회사 내에서 내부적인 견제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계약이 이대로 체결되면, 미소 씨의 회사뿐만 아니라 미소 씨 개인에게도 엄청난 타격이 될 겁니다."

재욱은 유 팀장의 보고를 듣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미소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당분간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재욱은 미소가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미소가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상황에서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그는 약사로서 그녀의 위장 건강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제는 '이사 이재욱'으로서 그녀의 직장 생활과 미래를 지켜줄 수 있는 기회였다.

재욱은 유 팀장에게 S제약과의 최종 미팅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다. 그리고 유 팀장에게 자신의 지시 외에 어떤 것도 행동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는 직접 미팅에 나타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S제약 사외이사'로서가 아니라, 미소를 지키러 온 그녀의 남자로서.

재욱은 약국 문에 '긴급 휴진' 팻말을 걸었다. 미소와의 관계를 망칠까 봐 그토록 숨겨왔던 자신의 화려한 신분이, 이제는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되었다. 재욱은 마음속으로 미소에게 용서를 빌었다.

'미소 씨, 이번만 제 마음대로 행동할게요. 제가 얼마나 미소 씨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제 배경이 미소 씨에게 해가 아닌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줄게요. 제발… 저를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재욱은 곧바로 최고급 정장으로 갈아입고, S제약 미팅 장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지식을 미소를 보호하는 데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미소의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되찾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임을 예감하면서.


18화. 미팅장의 굴욕, 벼랑 끝의 미소

다음 날 아침, S제약 본사 회의실. 김미소는 긴장감에 속이 쓰려왔지만, 억지로 진통제를 먹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녀의 회사 측에서는 팀장과 미소, 그리고 법무팀 직원 한 명이 참석했다. S제약 측에서는 실무 계약 담당 임원과 법률 고문이 자리했다.

미팅은 시작부터 미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S제약 측 임원은 미소의 회사에서 작성한 보고서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계약의 독소 조항들을 정당화하려 했다. 미소는 자신이 준비한 논리로 반박하려 했지만, 팀장이 중간에 끼어들어 미소의 발언을 막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김미소 씨가 일이 서툴러 약간의 실수를 했나 봅니다. 계약 조건은 이사님들께서 결정하신 대로 저희가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팀장은 노골적으로 미소를 깎아내리며 S제약 측에 아부했다. 미소는 팀장의 배신 행위에 경악했지만, 팀장은 미소에게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라고 경고했다. 미소는 자신이 완벽한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S제약 임원은 팀장의 태도를 비웃으며, 미소를 향해 더욱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김미소 씨가 작성하신 자료에는 이 독소 조항이 귀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것이라 분석되어 있던데, 김미소 씨 개인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본인의 전문적인 분석이 맞습니까, 아니면 팀장님의 지시가 맞습니까?”

미소는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스트레스로 온몸이 떨려왔다.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반론을 시작했다.

“제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 조항은 저희 회사의 초기 시장 진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순간, 팀장이 미소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앉혔다.

“김미소 씨! 적당히 해! 분위기 파악 못 해?”

미소는 굴욕감에 눈물이 고였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이 미팅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자존심마저도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최고급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미소는 그가 누구인지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S제약 임원은 남자를 보자마자 허둥지둥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 이재욱 이사님! 아니,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S제약 임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미소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재욱? 미소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매일 흰 가운을 입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던 '약사 이재욱'이 아니었다. 날카롭고 냉철하며, 압도적인 권위를 내뿜는 'S제약 사외이사 이재욱'이었다.

재욱은 미소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S제약 임원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회의 진행 상태가 영 좋지 않군요. 저희 회장님께 보고할 내용이 이렇습니까? 저는 이 건에 대해 다시 논의를 요청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S제약 이사로서 이 계약의 최종 검토를 위해 참석했습니다.”

재욱의 등장은 미소에게 충격과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그의 권력이,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구해줄 유일한 구원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면서.


19화. 권력의 역전, 그녀를 위한 방패

이재욱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회의실은 숨 막히는 침묵에 휩싸였다. S제약 임원은 당황했고, 미소의 팀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 미소만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재욱을 올려다봤다.

재욱은 자리에 앉아 미소의 회사 측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료를 훑어보는 속도가 매우 빨랐지만, 핵심을 꿰뚫는 분석력은 미소의 팀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 독소 조항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저희 회사의 공정 경쟁 원칙에도 위배됩니다.”

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회의실 전체를 압도했다. 그는 미소가 앞서 지적했던 모든 문제점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S제약 임원을 몰아붙였다.

“특히 이 김미소 씨가 지적한 이 리스크 분석은 매우 정확합니다. 저희 회사의 장기적인 이미지와 협력사와의 신뢰 구축에 오히려 해가 됩니다. 이 계약은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재욱은 '김미소 씨가 지적한'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미소의 팀장은 재욱의 말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욱이 미소의 편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재욱은 S제약 임원에게 단호한 어조로 계약 조건을 미소의 회사에 유리하게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단순한 협상이 아니었다. S제약의 사외이사이자 최대 주주의 조카로서,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미소를 보호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미소는 재욱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그의 화려한 배경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모든 스트레스와 위기를 해소시켜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미소의 팀장은 재욱에게 아첨하려 다가섰다.

“이재욱 이사님, 사실 저희 김미소 씨가 이 건을 맡기에는 너무 버거웠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재욱은 팀장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팀장님. 저는 이 미팅 자료를 준비하고 문제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분이 김미소 씨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계약을 김미소 씨의 의견대로 진행할 것을 S제약 측에 요구할 것입니다. 그녀의 분석은 완벽했습니다.”

재욱은 미소의 능력과 노력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인정해 주었다. 미소는 굴욕감을 씻어내고 다시금 자신감을 얻었다. 그녀의 회사 측은 재욱의 압도적인 존재감 덕분에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회의가 끝난 후, 재욱은 S제약 임원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지며 미팅이 마무리되었다고 통보했다. 그리고는 미소에게 다가섰다.

미소의 팀장은 재욱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재욱은 팀장을 무시하고 미소에게만 말을 걸었다.

“미소 씨.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저와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미소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재욱의 진심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동네 약사'로 살았던 그 시간들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권력을 사용한 이 순간이었다. 재욱의 진심은 말이나 약속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되었다.


20화. 재결합, 상처를 넘어선 사랑

미소는 재욱을 따라 S제약 본사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재욱의 등장에 놀란 S제약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지만, 재욱은 오직 미소에게만 집중했다.

재욱은 미소를 조용한 휴게실로 안내했다. 그는 미소를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안함과 간절함이 가득했다.

“미소 씨. 제가 미소 씨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도 섣불리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미소 씨가 그 미팅에서 겪는 고통을 실시간으로 들었을 때, 저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어요. 제가 가진 이 모든 배경과 권력이 미소 씨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은 맞지만, 미소 씨를 지키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재욱은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미소는 이미 눈물을 멈추고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을 읽었다.

“재욱 씨. 제가 두려웠던 건… 재욱 씨의 돈이나 권력이 아니었어요. 제가 사랑했던 ‘소박한 약사’의 모습이 전부 거짓일까 봐, 그래서 저를 향한 재욱 씨의 진심마저도 가짜일까 봐 두려웠어요.”

미소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오늘… 재욱 씨가 그 압도적인 권력을 저를 지키는 데 쓰는 걸 봤어요. 저를 속인 건 용서할 수 없지만, 재욱 씨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겠어요. 여전히 다정하고, 정의롭고, 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재욱 씨라는 것을요.”

재욱은 미소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미소 씨. 제가 약속할게요. 이제부터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을 겁니다. 저는 제 삶에서 미소 씨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아요. S제약 이사 이재욱으로서도, 늘봄 약국 약사 이재욱으로서도, 오직 김미소 씨의 남자 이재욱으로 살겠습니다.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겠어요?”

미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이미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재욱을 향하고 있었다.

“네, 재욱 씨. 다시 시작해요. 하지만… 다시는 저한테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제 위장약 말고, 재욱 씨의 배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재욱은 미소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안도감이 그의 불안했던 마음을 감쌌다.

그날 저녁, 재욱은 미소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미소는 재욱에게 기대어 편안하게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오랜만에 위장 통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불안과 스트레스가 재욱의 진심으로 완전히 치유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신분 차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잠시 휘청거렸지만,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다시 일어섰다. 이제 그들의 연애는 단순히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재욱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주는 강인한 사랑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오히려 미소가 그의 진정한 조력자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1화. 미소의 역전, 오해와 질투의 시선

S제약과의 계약 미팅에서 이재욱 이사의 도움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후, 김미소는 회사로 돌아왔다. 그녀는 더 이상 위장 통증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대신 사내의 차가운 시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에 직면했다.

미소의 팀장은 미팅에서의 굴욕과 재욱과의 관계가 드러날까 두려워 미소를 노골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들 역시 미소가 'S제약 재벌 2세'와 만난다는 사실에 경계심과 질투심을 드러냈다.

점심시간, 동료들은 미소 앞에서 속닥거렸다.

"김미소 씨 말이야. 그냥 약사랑 사귀는 줄 알았더니, 재벌 2세 꼬셔서 팔자 폈다더라."
"S제약 이사가 직접 미팅에 나타나서 김미소만 칭찬했다며?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데, 그걸 김미소가 감당할 수 있겠어?"

미소는 더 이상 이런 말들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재욱의 진심을 알았고, 미팅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재욱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그녀를 돕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성공을 오직 자신의 힘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재욱은 매일 미소에게 따뜻한 메시지와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을 약국에서 준비했지만, 미소는 재욱에게 단 하나의 부탁도 하지 않았다.

“재욱 씨. 저를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가진 능력으로만 인정받고 싶어요. 재욱 씨의 배경이 저의 방패가 되는 건 더 이상 원치 않아요.”

미소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욱은 그녀의 자존심과 당당함에 더욱 반했다.

“알겠습니다, 미소 씨. 저는 미소 씨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저는 약국에서 미소 씨를 응원하는 '동네 약사'로만 있을게요. 다만… 미소 씨가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을 때, 그때는 제가 가진 모든 걸 사용해서라도 미소 씨를 안아줄 권리를 허락해 주세요.”

재욱의 다정한 약속에 미소는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미소는 회사에서 더욱 독하게 일했다. S제약과의 성공적인 계약 덕분에 그녀의 이름은 회사 상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팀장과 동료들의 질투가 무색할 만큼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냈다.

한편, 재욱은 약국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S제약 회장은 미소와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소문이 돌았고, 재욱은 언제든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소는 회사에서 S제약 회장 비서실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김미소 사원님, S제약 이재욱 이사님과의 관계에 대해 저희쪽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미소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욱의 가족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소는 재욱에게 알리지 않고 이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욱이 이 일로 가족들과 더 큰 싸움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위장약에 의존하는 나약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그 거대한 벽에 맞설 준비를 했다.


22화. 비밀스러운 호출, 재벌가와의 첫 대면

김미소는 S제약 회장 비서실로부터 받은 호출을 재욱에게 숨겼다. 그녀는 재욱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그가 또다시 가족들과 충돌할 것을 걱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재욱의 연인으로서 당당하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 미소는 비서실이 안내한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강남 최고급 호텔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이었다. 도착해보니 그곳에서 회장이 아닌, 재욱의 작은어머니인 이 회장의 부인, '민 여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 여사는 S제약 경영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민 여사는 미소를 보자마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미소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평가하고 있었다.

“김미소 씨 맞나요? 앉으세요.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민 여사의 말투는 지극히 정중했지만, 그 이면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미소는 긴장했지만, 억지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위장이 다시 아프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네, 여사님. 이렇게 귀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자리라니요. 나는 그저 재욱이의 여자친구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재욱이가 그동안 얼마나 엉뚱한 취미 생활을 해왔는지는 아시겠지만, 이렇게 저희 집안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네요.”

민 여사는 '엉뚱한 취미 생활'이라는 말로 재욱의 약국 생활과 미소와의 관계를 은근히 비하했다.

“저는 재욱이가 왜 굳이 그 작은 약국을 고집하는지 잘 알아요. 그 아이의 소신 때문이죠. 하지만 김미소 씨. 재욱이는 S제약의 미래입니다. 그가 약사 가운을 벗고 이사직을 맡는 건 시간문제예요. 그때 옆자리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은, 그 배경과 위치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 여사는 테이블 위에 명함 한 장을 밀어놓았다. 명함에는 '미국 유학파 출신, 대형 로펌 변호사, 금융가 집안의 딸'이라는 화려한 이력의 한 여성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아이는 재욱이와 어릴 때부터 약혼 얘기가 오갔던 아이예요. 김미소 씨가 재욱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재욱이의 앞날을 망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죠. 저는 김미소 씨가 저희 집안을 이해하고 현명하게 판단해 주길 바랍니다.”

민 여사는 미소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는 대신, 재욱과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차가운 압력을 넣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소의 심장을 찔렀다. 미소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지만, 이젠 물러서지 않았다.

미소는 차가운 테이블 위의 명함을 집어 들지 않고, 민 여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민 여사님. 재욱 씨가 그 약국을 고집하는 건 소신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곳은 재욱 씨가 '이재욱'으로서 숨 쉬는 유일한 공간이니까요. 저는 재욱 씨가 왜 그곳을 소중히 여기는지 이해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저는 재욱 씨의 배경이 아니라, 그 소신과 다정함 때문에 재욱 씨를 사랑합니다. 저는 절대로 재욱 씨를 놓칠 생각이 없습니다.”

미소는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도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민 여사는 미소의 예상치 못한 강단 있는 태도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차가운 미소를 되찾았다.

“재욱이가 평범한 여직원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 세상은 사랑만으로는 굴러가지 않아요. 두고 보죠.”

민 여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가버렸다. 미소는 혼자 레스토랑에 남아, 재욱의 가족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벽임을 실감했다. 그녀는 바로 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숨겨서는 안 되었다.


23화. 폭발하는 분노, 재욱의 선포

민 여사와의 만남을 마치고 미소가 재욱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재욱은 이미 그녀의 부재를 알고 있었다. 재욱은 미소가 회사 회장 비서실로부터 호출받았다는 유 팀장의 보고를 듣고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미소 씨! 어디예요?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혹시 저희 작은어머니 만난 거예요?”

재욱은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미소는 재욱에게 민 여사와의 만남과 오고 갔던 대화의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

재욱은 분노했다. 그가 미소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있는데, 가족들이 뒤에서 미소를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미소 씨! 당장 그 자리에서 나와요. 제가 지금 미소 씨한테 갈게요. 미소 씨는 저의 여자친구예요. 함부로 평가받을 대상이 아니에요!”

재욱은 늘봄 약국 문을 잠그고 서둘러 미소가 있는 호텔로 향했다. 그가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미소는 이미 나와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했지만, 눈빛은 강인했다.

“재욱 씨, 괜찮아요. 제가 잘 대처했어요. 저는 재욱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미소는 재욱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재욱은 미소를 품에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소 씨, 미안해요. 제가 모든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소 씨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

그날 밤, 재욱은 미소를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본가로 향했다. 그는 더 이상 가족들의 압박을 참을 수 없었다. 재욱은 본가 거실에서 민 여사와 이 회장, 그리고 자신의 작은아버지까지 모든 가족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욱은 격앙된 목소리로 민 여사에게 따졌다.

“작은어머니, 도대체 무슨 권리로 미소 씨를 만나셨어요? 미소 씨는 제 여자친구입니다. 저희 집안의 재력이나 배경으로 함부로 평가하고 협박할 대상이 아닙니다.”

민 여사는 재욱의 분노에 당황했지만, 곧 차가운 표정으로 맞섰다.

“재욱아, 네가 이성적이지 못하구나. 너 그 여자와 진심으로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재욱아, 네가 가진 것을 생각해. 그 여직원 한 명 때문에 네 평생을 바칠 수 있는 S제약을 포기할 수 있겠니?”

“네. 포기하겠습니다.”

재욱의 단호한 선포에 거실 전체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 회장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처음부터 S제약 이사직이나 후계자 자리에 관심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늘봄 약국 약사 이재욱으로 사는 거예요. 미소 씨는 제 삶의 이유이자, 저에게 소신을 지켜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만약 미소 씨와의 관계가 제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당장 이 모든 걸 포기하고 미소 씨와 함께 떠나겠습니다.”

재욱은 자신의 결심을 담아 선언했다. 그는 미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를 보여주었다. 그의 진심은 가족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고, 이 회장은 재욱의 단호함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재욱은 가족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남기고 본가를 나섰다.

“다시는 미소 씨를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미소 씨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가하거나, 회사에 압력을 넣는다면… 저는 S제약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미소 씨와 함께 이곳을 완전히 떠날 것입니다.”

재욱은 이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삶과 직업,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건 일생일대의 도전을 시작했다. 그의 사랑은 신분과 배경을 뛰어넘어,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24화. 미소의 결단, 스스로의 성취

재욱이 가족들에게 단호한 선포를 한 후, S제약 집안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 회장은 재욱의 진심에 충격을 받았고, 함부로 미소를 건드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재욱의 사랑이, 그가 가진 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소는 재욱의 희생과 결심에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재욱의 소중한 삶과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원인이 될까 두려웠다. 그녀는 재욱의 헌신적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소는 회사 생활에서 더욱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냈다. S제약과의 성공적인 계약 덕분에 그녀의 입지는 탄탄해졌고, 팀장과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는 이제 그녀의 성취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그녀는 강남 최고의 회사원으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올렸다.

어느 날, 미소는 재욱의 늘봄 약국으로 찾아갔다. 약국은 변함없이 따뜻했고, 재욱은 흰 가운을 입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재욱 씨. 저 오늘 승진 심사 명단에 올랐어요.”

미소는 재욱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재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미소 씨! 역시 제 여자친구답네요! 저는 미소 씨가 가진 능력과 잠재력을 믿었어요.”

미소는 재욱의 손을 놓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재욱 씨. 제가 민 여사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재욱 씨가 가족들에게 선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생각했어요. 저는 재욱 씨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걸 원치 않아요. 재욱 씨는 S제약 이사 이재욱으로서도, 늘봄 약국 약사 이재욱으로서도 충분히 멋있는 사람이니까요.”

“미소 씨….”

재욱은 감동하여 미소의 눈을 바라봤다.

“저는 재욱 씨의 약사로서의 소신을 지켜주고 싶어요. 그리고 재욱 씨의 가족들, 그리고 S제약이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재욱 씨의 옆을 지켜줄 거예요. 제가 더 이상 나약해서 재욱 씨의 위장약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거예요. 저는 재욱 씨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미소의 결단에 재욱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재욱은 미소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췄다.



“미소 씨. 고마워요. 미소 씨 덕분에 제가 두려워했던 이중생활이, 이젠 축복이 될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라면, 저는 약사로서의 소신도, 가족들이 원하는 책임도 모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동반자적 관계로 진화하고 있었다. 미소는 이제 재욱의 소박한 꿈과 거대한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가장 강인하고 아름다운 조력자가 되었다.


25화. 평화로운 일상, 다음 단계로의 도약

재욱의 단호한 선포와 미소의 성숙한 결단 이후, 두 사람의 연애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재욱의 가족들은 더 이상 미소를 압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욱이 정말로 미소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소를 인정하는 듯 한 분위로 가는 듯 했다.

미소는 회사의 스트레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힘들 때마다 재욱의 따뜻한 눈빛과 위로의 말을 떠올렸고, 위장약 대신 재욱이 추천해 준 건강 차를 마셨다.

재욱은 약국 운영을 계속했고, S제약의 이사직은 비상 상황에만 관여하며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미소는 주말마다 재욱의 약국에 들러 그를 도왔다. 약국에 찾아온 손님들은 미소의 아름다움과 재욱의 다정함에 감탄하며, 두 사람을 '동네 대표 선남선녀' 커플로 인정했다.

토요일 오후, 재욱은 약국 문을 일찍 닫고 미소와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날은 미소가 승진 심사에 통과해 정식으로 팀장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미소는 이제 강남의 스트레스 가득한 회사 생활 속에서도, 당당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미소 팀장님, 승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재욱은 미소의 손을 잡고 축배를 들었다.

“재욱 씨 덕분이에요. 이제 저도 재욱 씨의 복잡한 현실에 조금은 보탬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소는 웃으며 말했다. 재욱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미소에게 내밀었다.

“미소 씨. 이건 제가 처음 미소 씨를 만났을 때부터 주고 싶었던 선물이에요. 미소 씨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저의 약속입니다.”

상자 안에는 화려한 보석 대신, 커플 은반지가 들어 있었다. 반지 안쪽에는 작은 글씨로 '평생의 안식처(安息處)'라고 새겨져 있었다.

미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지를 받아들었다. 화려한 재벌의 약혼반지보다, 재욱의 진심이 담긴 이 소박한 반지가 그녀에게는 훨씬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고마워요, 재욱 씨. 저도 재욱 씨의 평생의 안식처가 되어 줄게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다. 재욱은 미소의 눈빛에서 더 이상 스트레스나 불안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치유되었고, 그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결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재욱의 가족들이 이대로 순순히 이 결혼을 허락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가족의 반대와 사회적 편견이라는 마지막 시험대에 올라야 했다.


26화. 최후의 통보, 재욱의 사직서

은반지를 교환한 후, 이재욱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자신의 평생의 동반자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주말 오후, 재욱은 미소를 위해 특별한 만찬을 준비했고, 그 자리에서 정식으로 청혼했다.

“미소 씨. 제가 미소 씨에게 숨겨왔던 모든 것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이제 미소 씨는 제 삶의 가장 진실하고 소중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화려한 배경이 미소 씨에게 스트레스가 될지라도, 저는 이제 미소 씨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늘봄 약국의 따뜻한 약사로서, 그리고 S제약 이사 이재욱으로서, 미소 씨의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재욱은 진심을 담아 청혼했다. 미소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네, 재욱 씨. 저는 재욱 씨의 약사로서의 소신을 가장 사랑해요. 제가 재욱 씨의 배경까지도 감당하고, 함께 지켜줄게요.”

두 사람은 결혼을 공식화하기 위해 이 회장(재욱의 큰아버지)을 찾아가기로 했다. 재욱은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재욱과 미소는 S제약 본사 회장실로 들어갔다. 이 회장은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 여사와 재욱의 작은아버지도 배석해 있었다. 이 자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통과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 회장은 미소를 차갑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김미소 씨. 미소 씨의 능력과 재욱이를 향한 진심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문은 S제약과 연결된 수많은 사회적 관계와 책임이 있습니다. 재욱이의 아내는 최소한 S제약의 미래를 함께 이끌어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이 회장은 미소에게 미소의 회사를 그만두고, S제약의 경영에 필요한 MBA 과정을 이수하거나, 가문이 정해놓은 특정 사회적 활동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상 미소가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재벌가의 며느리'라는 틀에 맞춰지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미소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회장님, 저는 재욱 씨의 소신을 존중하며, 저 역시 저의 커리어와 능력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방식대로 재욱 씨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이 회장은 미소의 말을 듣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재욱아. 너의 고집과 사랑은 알겠다. 하지만 네가 김미소 씨와 결혼하려면, S제약 후계자로서의 모든 책임과 권리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약국 하나만으로 살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는 너의 결혼을 허락하마.”

이것은 재욱에게 내려진 최후통첩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기업 경영 능력과 가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는 요구였다.

재욱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미소의 손을 잡고 이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큰아버지.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재욱은 품속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 안에는 ‘S제약 사외이사직 및 경영권 포기 각서’와 ‘S제약 지분 양도 각서’가 들어 있었다.

“저는 김미소 씨를 선택하겠습니다. S제약 이재욱으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김미소 씨의 남자, 늘봄 약국 약사 이재욱으로 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미소 씨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는 마지막 행동입니다.”

재욱의 단호한 선포에 회장실은 정적이 흘렀다. 이 회장은 재욱이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미소는 재욱의 희생에 눈물을 흘렸지만, 그의 용기에 감동했다. 재욱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27화. 미소의 반격, 진정한 가치를 증명하다

재욱의 사직서는 S제약 가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회장은 재욱의 단호함에 분노했지만, 동시에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재욱과 미소는 회장실을 나왔지만, 미소는 재욱의 희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재욱이 사랑하는 '약사 이재욱'의 삶도 존중해야 하지만, 그가 가진 뛰어난 능력과 S제약에 대한 책임까지 모두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재욱 씨. 저를 위해 모든 걸 버리는 건 원치 않아요. 재욱 씨의 능력은 S제약에 꼭 필요해요. 제가 가진 능력으로 회장님을 설득할게요.”

미소는 며칠 밤낮으로 재욱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녀가 가진 회사원으로서의 분석력과 팀장으로서의 설득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보고서의 제목은 ‘S제약의 미래 전략과 이재욱 이사의 핵심 가치’였다.

미소는 이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전달하고, 다시 한번 면담을 요청했다. 이 회장은 미소를 차가운 시선으로 맞이했지만, 미소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장님. 저는 재욱 씨를 단순한 재벌 2세가 아닌, 뛰어난 약학 박사이자 S제약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인재로 보고 있습니다.”

미소는 보고서를 펼치며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재욱 씨가 운영하는 늘봄 약국은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이는 S제약이 잃어버린, 고객과의 '최접점 데이터'를 수집하는 중요한 연구소입니다. 재욱 씨는 현장에서 환자들의 스트레스와 질병, 그리고 약에 대한 실제 피드백을 얻고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돈을 들여도 얻기 힘든 살아있는 정보입니다.”

미소는 S제약이 후계자로서 재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약사 이재욱'이라는 특출난 인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욱 씨는 약국을 포기하는 순간, S제약의 미래 동력을 잃게 됩니다. 재욱 씨가 약사로서의 소신을 지킬 때, 그는 가장 뛰어난 이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재욱 씨를 경영의 책임에서 해방시키고, 그의 소신을 지켜주는 대신, S제약의 '전략 자문위원'으로서 핵심적인 역할만 맡게 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사회에 참석할 때도 약사 가운을 입고 오라고 하세요. 그것이 S제약이 나아가야 할 '소비자 친화적' 기업 이미지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미소의 보고서는 재욱의 소신과 S제약의 미래 가치를 완벽하게 연결했다. 그녀의 분석은 냉철하고, 논리적이며,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나약한 회사원의 눈빛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치를 지켜주려는 강인한 동반자의 눈빛이었다.

이 회장은 미소의 보고서를 읽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여직원이 단순히 재욱의 사랑을 얻은 것을 넘어, 재욱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미소는 사랑의 진심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재욱의 가족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28화. 회장의 눈물, 진심의 인정

김미소의 보고서는 S제약 가문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회장은 미소의 논리적인 분석과 재욱을 향한 깊은 이해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미소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한 후, 재욱을 다시 회장실로 불렀다.

재욱은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는 미소의 보고서가 회장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재욱의 사직서와 미소의 보고서를 나란히 두고 앉아 있었다.

“재욱아.”

이 회장의 목소리는 이전의 근엄함 대신, 깊은 슬픔과 회한이 섞여 있었다.

“나는 네가 그 약국을 포기하고 이 기업을 물려받기를 바랐다. 그게 네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지막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작은 약국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리고 네가 진심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려 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네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는 줄 알았다.”

이 회장은 눈물을 보였다. 재욱은 생전 처음 보는 큰아버지의 눈물에 당황했다.

“내가 너의 소중한 삶을 빼앗으려 했구나. 그리고… 김미소라는 아가씨는 네가 왜 그 약국을 지켜야 하는지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더구나. 그녀는 너를 얻기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파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지켜주려 했다.”

이 회장은 미소의 보고서를 재욱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김미소 아가씨의 대답이다. 그녀는 너의 배경을 탐하지 않았고, 너의 소신을 짓밟지 않았다. 그녀는 너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이 회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욱아. 내가 너희 둘의 결혼을 허락하마. 조건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다만, 한가지만 약속해다오. S제약의 미래에 너의 지식과 소신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겠다고.”

재욱은 감격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그의 삶의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이 모두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회장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큰아버지.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지식과 소신을 S제약을 위해 쓸 것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저의 가장 중요한 직업은 늘봄 약국의 약사 이재욱입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이제 내 방패가 되어줄 아름다운 조카 며느리를 얻었으니, 나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겠다.”

이 회장은 민 여사와 작은아버지에게도 두 사람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을 통보했다. 민 여사는 미소의 능력과 재욱의 단호함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거대한 신분 차이와 가족의 반대를 극복하고, 마침내 축복을 받게 되었다.


 29화. 평화로운 결혼 준비, 새로운 시작

이 회장의 공식적인 승인 이후, 재욱과 미소는 행복한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S제약 가문에서는 호화로운 결혼식을 원했지만, 미소는 재욱이 사랑했던 늘봄 약국의 분위기처럼 소박하고 의미 있는 결혼식을 원했다.

결혼식 장소는 화려한 호텔 대신,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진심을 나누었던 약국 근처의 작은 야외 정원으로 정해졌다. 하객들은 재욱의 가족들과 회사 사람들, 그리고 늘봄 약국을 아껴주던 동네 주민들로 채워졌다.

미소는 결혼 준비를 하면서 중대한 결심을 했다.

“재욱 씨. 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어요.”

재욱은 놀랐지만, 미소의 눈빛에서 불안함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설렘을 읽었다.

“회장님께서 이제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갑자기…?”

“재욱 씨. 제가 회사를 그만두는 건, 재욱 씨에게 기대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저는 이제 스트레스성 위장병 환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선물하고 싶어요. 제가 회사에서 얻은 마케팅 능력과 재욱 씨의 약학 지식을 합쳐서, 스트레스 해소 전문 웰니스 스타트업을 시작하려고 해요. '늘봄 헬스 컨설팅' 어때요?”

미소는 이제 만성적인 회사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더욱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재욱은 그녀의 용기와 진취적인 모습에 감동했다.

“역시 제 여자친구답네요. 제가 든든한 약사가 되어 드릴게요.”

한편, 재욱은 이 회장의 제안대로 S제약의 사외이사직을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대신 ‘S제약 미래전략 자문위원’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았다. 이는 미소가 제시했던 대로, 경영의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약학적 소신과 현장 지식을 S제약에 제공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매주 한 번 본사에 출근했지만, 여전히 흰 약사 가운을 입고 갔다.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미소는 웨딩드레스 대신, 맞춤 제작한 우아한 흰색 슈트를 입기로 했다. 그녀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이제 재벌가의 며느리라는 타이틀 대신, '이재욱의 소신을 지켜준 여자'라는 당당한 이름표를 달았다.

결혼식 전날 밤, 미소는 늘봄 약국을 찾아 재욱과 마주 앉았다. 약국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공간이었다.

“재욱 씨. 저희의 이야기가 정말 로맨스 소설 같아요. 평범한 회사원이 미남 약사를 만나고, 그가 재벌 2세라는 사실에 절망했다가, 결국 서로의 진심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냈으니까요.”

재욱은 미소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맞아요,미소 씨. 우리의 사랑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아요. 이 약국이 제 삶의 안식처였던 것처럼, 이제 미소 씨가 저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며, 내일 시작될 새로운 인생과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30화 (최종화). 영원한 안식처, 결혼 후 3년

어느새 두 사람이 결혼한 지 3년이 되었다. 계절은 봄, 그리고 언제나처럼 ‘늘봄’의 이름에 어울리게 세상은 따뜻했다.

김미소는 이제 ‘늘봄 헬스 컨설팅’의 CEO로서 건강관리와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 분야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단순히 건강 보조식품을 추천하는 회사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돌보고 회복을 돕는 공간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한때 병들고 지쳐 있던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힘들수록 약보다 휴식이 필요해요.”
그녀는 상담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여전히 따뜻하고 진심이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잠시 자신을 바라보았다. 세월의 결이 조금씩 얼굴에 스며들었지만, 그 대신 평온이 자리했다. 바쁘게 달려온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사랑과 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그녀를 지탱했다.

이재욱은 여전히 늘봄 약국의 약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흰 가운을 입고 동네 주민들의 건강을 살피고, S제약의 미래 전략 자문위원으로서 기업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의 삶은 바빴지만, 그는 완벽하게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웠다.

어느 맑은 오후, 미소는 약국에 들러 재욱을 기다렸다. 약국 문에는 [임시 휴진, 가족 여행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계획 중이었다.

재욱이 약사 가운을 벗고 미소에게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멋진 미남 약사였다.

“미소 씨. 이제 우리 둘만의 시간입니다. 어디로든 떠나서, 휴대폰은 잠시 꺼두고 푹 쉬어요.”

“좋아요, 재욱 씨. 사실은…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어요.”

미소는 재욱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따뜻했으며, 3년 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약한 회사원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재욱 씨. 저… 재욱 씨의 아기를 임신했어요. 이제 곧 세 가족이 되겠네요.”

재욱은 이 말을 듣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미소를 품에 안고 세상의 모든 행복을 얻은 듯 크게 웃었다.

“고마워요, 미소 씨. 정말 고마워요. 이제 우리의 안식처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겠네요.”

두 사람은 약국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위장병에 시달리던 미소, 자신의 진심을 숨기고 이중생활을 해야 했던 재욱. 그 모든 고난과 갈등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더욱 소중했다.

미소는 흰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는 재욱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거대 기업의 막강한 배경을 가진 재벌 2세였지만, 미소에게는 오직 따뜻한 ‘늘봄 약국의 약사 이재욱’일 뿐이었다.

미소는 이제 알았다. 그녀가 그토록 자주 찾았던 위장약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녀의 평생의 스트레스 해소제이자, 가장 든든한 안식처는, 바로 이재욱이었다.

미소는 환하게 웃으며 재욱에게 말했다.

“재욱 씨. 저희의 영원한 안식처로 떠날까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약국 문을 나섰다. 햇살이 따스하게 그들의 앞길을 비추었고,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빛났다.

 

 

[끝]

 

 

※ 본 콘텐츠는 빛나의 창작물이며,
모든 저작권은 원작자 빛나에게 있습니다.
무단 사용, 복제, 상업적 활용을 금합니다. 위반 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 2025. 빛나. All rights reserved.

 

창작소설 연애소설 로맨스소설 로맨스 단편소설 청춘로맨스
#로맨스소설, #창작소설, #첫사랑, #달달한, #웹소설, #사랑얘기 #로맨스물

반응형